신부동 대아아파트의 한 벽면에 붙여진 대통령후보 선전벽보.
이회창 후보와 노무현 후보의 양강대결로 압축되면서 노선 정책이 대조적이다.
이 후보는 보수와 안정을, 노 후보는 진보와 변화에 무게를 두고 있다. 김대중 정부에 대해서도 비판과 차별화를 강조하는 이 후보와는 달리 노 후보는 계승과 보완에 목소리를 높인다.
대북정책에 있어 이 후보는 비판적 입장이며 노 후보는 계승차원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한?미 관계는 모두 공조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고 주한미군 주둔에도 긍정적이다. 경제정책은 집권시 성장잠재력을 이 후보는 6%, 노 후보는 7%를 내놓고 있다. 이 후보가 친시장 친기업적인데 반해 노 후보는 중산 서민층을 지향하고 있다. 사회복지정책도 이 후보는 복지와 경제 효율성을, 노 후보는 분배와 형평성을 강조하고 있다.
부패방지책은 두 후보 모두 대통령 친인척 비리를 원천 차단하는 제도적 장치를 갖춰야 한다는데 목소리를 같이 하나 방법론은 다르다.
노동정책과 관련, 이 후보는 고용차별 해소와 근로기본권 존중, 근로복지제도 개선을 공약했으며 노 후보는 적극적 노동정책을 통해 완전고용을 실현하고 향후 5년간 일자리 2백50만개를 창출하겠다고 약속했다.
반면 권영길 후보는 이들과는 확연한 차별화를 선언, 독자적인 자세를 취했다.
북한 핵문제와 관련, 먼저 북한의 핵개발 포기 선언을 요구하는 타 후보들과는 달리 미국의 대북압박철회를 선결요건으로 규정하고 있다. 또한 남한의 우선적인 군축과 미군의 단계적 철수도 요구했다.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노동분야다. 다른 후보들이 비정규직의 권리보호를 주장하는데 반해 권 후보는 아예 비정규직 철폐를 주장한다. 임금삭감 없는 주5일근무제, 노동자 소유 및 경영참가제 실시 등도 요구했다.
후보이력 점검-법조인과 언론인으로 활동
제16대 대통령선거 후보자는 총 7명. 이중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와 민주당 노무현 후보의 양자구도로 압축되고 있으며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가 약진을 보이고 있다.
후보간 나이순은 이한동(68?하나로 국민연합) 후보가 제일 어른이며 이회창(67?한나라당), 장세동(66?무소속), 권영길(61?민주노동당), 노무현(56?민주당), 김영규(56?사회당), 김길수(54?호국당) 후보순이다.
이회창 후보는 충남 태생으로 서울대, 하버드대를 나와 88년 대법원 판사직을 떠나기까지 30년간 법조계에 몸담았으며, 이후 중앙선관위원장, 대법관, 감사원장, 국무총리를 거쳐 96년 신한국당 선대위원장으로 정치계에 첫 발을 내디뎠다. 97년 대통령 후보로 나왔다 석패했고, 제15?16대 국회의원이자 한나라당 총재로 대권의 꿈을 꾸고 있다.
경상도 사투리가 구수한 노무현 후보는 부산상고, 육군 만기제대, 결혼 후 30의 나이에 사법고시에 합격, 판사생활 1년 후 변호사를 개업했다. 81년 부림사건 변론으로 인권변호사란 호칭을 얻었으며 6월 민주항쟁을 주도했다. 87년에는 대우조선 사건으로 구속, 변호사 업무정지 처분을 받기도 했다.
88년 제13대 국회의원에 등극, 88년 제5공화국 비리조사때 청문회 스타로 발돋움했으며 90년 민자당 3자 합당을 거부, 의원직을 사퇴하기도 했다. 지역감정 해소 등 부산으로 내려가 시장, 총선에 도전하기도 했다. 2000년 8월 해양수산부 장관, 민주당 최고위원을 역임, 서민대통령을 자처하며 대권 도전에 나섰다.
이회창, 노무현 후보가 법조계에 몸담았다면 권영길 후보는 언론계에서 활동한 사람이다. 67년 대한일보, 서울신문 기자를 거쳐 88년 노동운동에 투신, 언론노련 초대와 2?3대 위원장을 지냈다.
93년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 공동대표를 맡았으며 우리농업지키기 국민운동본부 대표, 5?18 학살자처벌 특별법대책위 대표, 겨레사랑 북녘동포돕기 범국민운동본부 대표에 이어 97년 국민승리21의 대통령 후보이기도 했다.
99년 민주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 상임대표를 지내며 2000년 민주노동당 대표로 정치?경제개혁을 부르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