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너 닫기
뉴스등록
맨위로

나는 홍대용 선생의 6대손

등록일 2002년11월30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천안방면에서 수신면 지방도로 가다보면 상록리조트 너머 장산리라는 농촌마을이 나온다. 뒤에는 아담한 산세가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앞에는 병천천의 넓은 내가 흐르는 50여호의 장산리.

그림같은 풍경을 이루는 이곳은 조선조 북학파의 대가, 홍대용 선생 생가가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생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홍대용 선생의 묘가 2백년 넘게 자리잡고 있는데 그곳에 12년째 묘지기를 하고 있는 6대손, 홍승혁(71)씨가 아내와 아들 하나를 두고 외따로이 살고 있다.

하루종일 구질구질 비가 내리던 지난 26일(화) 같은 마을 정상용(78)씨가 찾아가니 오랜만에 벗을 만난 듯 한걸음에 뛰쳐나와 반갑게 맞는다.

이들이 왕래한 지도 어언 10여년째. 홍대용 선생 생가복원을 위한 공통의 목표를 갖고 있기에 만나기만 하면 홍대용 선생 이야기로 시간가는 줄 모른다. 한때 잘 운영되던 무역업이 하루아침에 빈털털이로 전락돼서였는지 시력이 급격히 나빠지며 현재는 ‘실명(장애1급)’ 에 가까운 상태. 오히려 선그라스를 써야 주변시야가 약간이나마 보일 뿐이다.

얘기보따리를 풀자 보통 자식자랑이 끝없다고 하듯 그의 홍대용 선생에 대한 자랑은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홍대용 선생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이미 전문가 수준을 넘어선 것. 그는 홍대용 선생의 모든 유물들은 숭실대학교 박물관을 비롯해 몇몇 대학에서 보관하고 있다며 뿔뿔이 흩어져 있다는 아쉬움 속에서도 분실염려가 적다는 게 위안이 된다고.

“20년 전만 해도 홍대용 선생이 직접 만든 해시계가 생가 앞에 있었는데 어느날 사라지고 말았죠. 탐내는 사람들이 많았었는데….”

방치해 둔 것이니 어쩌면 분실은 정해진 수순이었는지도 몰랐다.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은 고작 홍대용 선생 전신 스케치뿐. 이것도 지난해 중국 어느 대학도서관에 있던 자료를 복사한 것이라며 “이외 가지고 있던 초상화는 사람들이 하도 복사를 하는 통에 뭉개져 버렸다”고 전했다.

홍대용 선생 생가에는 ‘섬’도 있었다고 한다. “말이 섬이지 자그마한 연못 가운데에 능수각을 두어 거기서 천문관측을 했던 것으로 압니다. 연못은 쪽배가 띄어져 있었으며 두세번 저으면 갈 정도로 넓지 않았을 거예요.”

홍대용 선생이 3년 동안 ‘홍천의’를 연구?제작하는데 선생 부친이 당시 5만냥이란 큰 돈을 대주기도 했다. 이 같은 내용으로 볼때 홍대용 선생의 끊임없는 실험정신과 사상은 집안의 두터운 배려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몰랐다.

12년 전 사업실패 등으로 이곳을 찾아왔다가 눌러 살게 됐다는 홍승혁씨는 그의 아내가 집 옆에 작은 음식점을 운영, 생활을 꾸려나가고 있다. 대가 귀해 6대손인 자신을 포함, 홍대용 선생 직계후손은 총 20명이 안된다는 그의 현재 바람은 두 가지. 생가복원이 순조롭게 이뤄지는 것과 홍대용 선생 묘로 올라오는 차량길이 불편해 이를 개선하는 것이다.

“도로변에서 이곳 묘 사이의 4백여평이 국유지로 알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방치돼 있는 이곳이 길이 되면 홍대용 선생을 찾아오는 국내외 방문객에게 편의를 제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가끔 학계 사람들이 찾아오면 몇 시간이고 홍대용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이 어느덧 그의 유일한 낙이 되어버린 지금 실사구시를 통한 실험정신이 투철했던, 당시 미래정신의 선구자 홍대용 선생에 대해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져주길 간절히 당부했다.

김학수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관련뉴스 - 관련뉴스가 없습니다.
유료기사 결제하기 무통장 입금자명 입금예정일자
입금할 금액은 입니다. (입금하실 입금자명 + 입금예정일자를 입력하세요)

가장 많이 본 뉴스

종합 뉴스 라이프 우리동네 향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