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중서예상은 한국 서예의 거목 일중 김충현(1921∼2006) 선생을 기리기 위해 제정됐다.
심사는 일중선생기념사업회 이사회에서 폭넓은 원로와 중진서예인 대상자를 놓고 시행규정에 의거, 장시간에 걸친 심사를 갖는다. 서예상으로는 1978년 제정한 원곡서예문화상에 이어 두번째다. 사업회는 서예·문인화·전각 분야에서 2년마다 만50세 이상 작가에게 대상(상금 2000만원)을, 만40∼50세 작가에게 장려상(상금 500만원)을 수여한다.
일중 선생은 독학으로 한글서체를 익혀 21세때인 1942년 위당 정인보 선생이 서문을 써준 ‘우리글씨 쓰는 법’을 펴냈고, 훈민정음 고판본을 기초로 한글고체를 창안했다. 해방 후엔 소전 손재형(1903∼1981) 선생과 함께 한국서단을 이끌었다.
누가 날 ‘취묵헌’이라 하는가
대상자로 선정됐다는 소식은 이미 1월 중순쯤에 받았다는 인영선 선생. 요즘 지인들의 축하전화를 받느라 ‘분주’하다.
일중서예상의 4번째 수상자는 천안의 ‘인영선 선생’이 이름을 올렸다.
인영선 선생은 충남 아산 출생으로 1965년 천안농고를 졸업하고 경희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인 선생이 한자(서예)와 인연을 가진 것은 3살 때지만, 본격적으로 서예의 길에 들어선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어느날 환경미화를 위해 쓴 붓글씨에 반한 장학사가 서예를 지도해주면서부터”였다는 그는 수십년, 물욕 없이 오직 서예에만 심취해 왔다. 그의 서예 사랑과 재능은 평생 한문에만 몸담아 사신 증조부, 조부, 부친의 3대에 걸친 솜씨를 고스란히 이어받은 때문이기도 하다.
스스로 호를 ‘취묵헌’이라 한 데는 명리(名利)에 뜻을 두지 않고 부귀(富貴)를 탐하지 않고 오로지 묵(墨)에 취해 일생을 자오(自娛)한다는 깊은 뜻이 담겨있다.
가끔 서울을 오가며 후학에 힘쓰는 그. 1972년 ROTC장교 제대 후 천안 문화동 구청사에서 재래시장길로 내려오는 길가 건물 3층에 마련한 서실, ‘이묵서회(以墨書會)’는 30년 세월을 함께 한 벗이 됐다. 당시 지방에는 서실이 없던 시절, 천안에서는 서실경영의 효시가 된 셈이다.
제4회 일중서예상 대상 시상식은 오는 4월24일(목) 오후 5시 백악미술관(서울 종로구 인사동9길 16) 2층 전시실에서 계획돼 있으며, 더불어 이날부터 4월30일까지 이곳 전시실에서 3회 일중서예상 대상 수상자인 이돈흥 초대전이 열린다.
1~3회 일중서예상 대상자는 누구?
2008년 사단법인 일중기념사업회(이사장 김재년)는 제1회 일중서예상 대상 수상자로 남전 원중식씨를 선정했다. 원중식씨는 인천 제물포고 재학시절부터 16년간 검여 유희강 선생에게 서예를 배웠다. 서울대 농대를 졸업하고 서울대공원 식물과장으로 90년까지 공무원 생활을 하며 서예가로서도 일가를 이뤘다.
2010년 제2회때는 모암 윤양희씨를 선정했다. 청양 출생의 윤양희씨는 연세대 교육대학원을 졸업하고 13년간 한국교육개발원 책임연구원과 1994년부터 2007년까지 계명대 미술대학 교수를 지냈다. 1966년 철농 이기우 선생에게 서예와 전각을 사사받은 그는 대한민국미술대전 우수상, 통일서예대전 대통령상을 수상한 바 있다. 저서로는 중·고등학교 서예교과서, 바른한글서예, 쉬운 판본체 등 다수.
2012년 제3회때는 학정 이돈흥씨가 대상의 영예를 거머줬다.
이돈흥씨는 전남 담양 출생으로 20대에 들면서 서예에 입문, 송곡 안규동 선생에게 사사받으면서 서예의 골간을 익혔다. 이후 ‘학정체’라는 독자적인 서예체를 개발해 한국서단에서 중진서예가 명성을 얻었으며 중국을 오가며 서법 및 서단교류에 힘써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