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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죽음’과 가려진‘진실’

등록일 2013년04월30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이순신(1545~1598) 장군은 임진왜란 발발 16년 전인 1576년(선조9년) 2월 식년무과에 급제했다.

식년무과는 3년에 한 번 실시하는 정식무과시험으로 합격 자체가 어려운 시험이었다. 1576년 합격자 명단을 보면 최고령 합격자는 45세이고, 평균 합격연령이 34세였다. 우리가 알던 것과 달리 32세에 합격한 이순신은 오히려 젊은 편에 속했다.

당시 이순신의 성적은 ‘병과4등’으로 전체 합격자 29명 중 12등에 해당했다. 당시 무과시험은 초시, 복시, 전시 등 3단계였는데 최종 합격서열을 정하는 전시시험은 일종의 스포츠 경기인 격구만으로 치렀다.

이순신 장군은 병법 지식을 평가하는 강서와 활쏘기에 능했지만 이들은 전시 시험 종목이 아니었으므로 최종 성적이 좋을 수 없었다. 당시 무과합격자 29명 중 25명이 내금위, 갑사 등 현직 군인이었다. 민간인 신분이던 이순신 장군이 체계적으로 승마기술을 배운 현직 군인들을 능가하기는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당시 무과시험은 1등인 갑과 수석은 초임 품계가 종6품, 갑과 나머지 2명은 정7품, 을과 합격자 5~7명은 정8품, 이순신 장군과 같은 병과 합격자는 9품이 수여됐다. 이순신 장군이 9품 보직인 권관으로 군생활을 시작한 것도 이 때문이다. 오늘날 9급공무원 정도에 해당하는 하급군인 신분에서 16년 만에 해군참모총장격인 삼도수군통제사까지 올라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후 죽음을 맞았다.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 생사를 넘나드는 전쟁터에서 이순신 장군이 남긴 대표 어록이다.
지난 4월28일은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역사인물로 꼽히는 성웅 이순신 장군의 탄신일이었다. 16세기 전쟁 중에도 조정은 당쟁으로 난잡했고, 무능한 대신들에게 놀아난 왕은 이순신이라는 시대적 영웅을 탄압하고 죽음으로 내몰았다. 당시 선비들은 침묵했고, 민중들은 영웅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몰랐다.

오늘은 어떤가. 남북한 긴장관계를 부추겨 수 십 조 원의 무기거래가 추진되고, 우리 민족에게 가장 큰 고통을 안겨준 일본은 재무장하고 있다. 남북화해와 평화공존의 상징인 개성공단은 최악의 위기로 내몰리고 있다. 위정자들의 왜곡과 지식인의 침묵이 16세기 무능했던 조정과 무엇이 다른가. 진실이 무엇인지 민중들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편집국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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