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6일(수) 천안시청 회의실에서는 이근영 천안시장의 이임식이 조촐히 열렸다.
지난 26일(수) 오전 10시30분 시청 회의실에서 조촐히 이임행사를 가진 이근영 천안시장이 시민들의 축복 속에 평범한 ‘소시민’으로 돌아갔다.
지난 3월5일(화) ‘머물던 자리도 깨끗이 하고 떠나겠다’며 불출마를 선언했을 때만 해도 일각에서는 정치꽁수라느니, 다른 이들이 가만두지 않을 거라느니 말잔치를 벌였으나 그들의 말이 무색하게 이 시장은 조용히 69세의 나이로 시청을 떠나갔다.
공무원의 세계에 대해 “잘못했을 때는 꾸지람과 비판을, 잘하고 있을 때는 아낌없는 칭찬을” 당부하는 그의 모습에서 공무원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엿보였다.
피폐해진 농촌과 재래시장 문제도 언급했는데, 전국적인 현상이면서도 어쩔 수 없는 현실에 천안시를 관장하는 사람으로서의 고뇌를 내비쳤다.
90년도부터 매년 인구증가율이 4~5%대를 나타내며 ‘급성장하는 도시’로의 풍부한 잠재력을 가진 천안시. 특히 95년부터 7년 사이 10만이 증가한 43만명을 넘어서고 있는 천안시의 중심에는 민선1·2기를 관장한 이근영 시장이 있었다.
천안발전의 주인공, 이근영 시장86년 53세의 나이에 관선시장이 된 그는 4번의 관·민선 천안시장을 역임하며 보잘 것 없던 천안시의 도시규모를 점진적으로 확대시켰고 동시에 안정적인 도시기반의 틀을 형성했다는 평이다.
민선2기 자치시정 출범과 함께 벌여온 시정100대 과제는 몇몇 민자사업을 제외하고는 모두 순조롭게 추진되고 있다. ‘IMF’의 여건을 감안하면 체계있고 안정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 시장 임기가 마무리된 지금 100대 과제중 62개 사업이 마무리됐으며, 추진중인 38개의 사업도 민선3기 지속사업으로 마무리할 예정이다.
민선1·2기의 이 시장 임기동안 이룩해 놓은 주요 사업으로는 농산물도매시장 개장(95년)을 비롯해 두정육교개량 완공(96년), 쓰레기대란 타결(96년), 남부대로 개통(97년), 천안천 개량(97년), 성거도서관 준공(97년), 제3산업단지 완공(98년), 아우내 은빛복지관 개관(99년), 충무로 천안고가교 개통(99년), 병천 상수도시설 준공(2000년), 태학산 자연휴양림 조성(2000년), 천안종합운동장 준공(2001년), 백석동 생활폐기물 소각시설 준공(2001년), 불당대로 개통(2001년), 재래시장 활성화 추진사업 등을 꼽을 수 있다.
이같이 많은 사업을 추진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주민반발이다. 추진사업들이 항상 시행정과 해당 주민들을 만족시킬 수는 없는 일. 그러다 보니 반발이 길게는 1년 이상 끌리며 ‘지지부진’해지는 요인을 낳기도 했다.
“일단 결정된 시책은 약간의 부작용이 있다 해도 일관성을 갖고 추진하는 게 바람직하다. 물론 시책과정은 참으로 중요하다. 시의회, 시민공청회 등 사안에 따라 충분한 의견수렴을 거친 후 결정해야 한다. 주민의 반대에 대해서는 논리를 앞세워 끈기있게 대화와 설득으로 풀어나가야 한다”는 게 이근영 시장이 말하는 그동안의 소신이었다.
청렴결백한 남편인 시장은 명예와 권력을 얻었지만 돈을 얻지는 못했다. 그의 부인인 이정혜 여사는 남편에 대해 “깨끗하고 강한 추진력으로 원리원칙을 고수하는 분”이라며 “이 때문에 때론 고지식한 면으로 비쳐지기도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중매로 결혼해 1남만을 두었으며 한달 생활비는 2백만원선. 그러나 식구가 적은 이들 부부는 ‘대외비’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귀띔.
‘착한 이들만이 꽃을 사랑한다’는 말처럼 베란다에서 정성껏 꽃을 가꾸는 모습속에 소박하고 서민적인 정서가 배어 있다. 둘 다 천주교 신자. 이 여사는 “그분의 청렴결백함을 지켜나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을 최선의 내조로 생각해 왔다고 말했다.
지난 26일(수) 시청은 아침부터 찾아드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이들의 용건은 단 하나. 10시30분에 있을 이임식을 끝으로 시청을 떠나는 이근영 시장과 잠깐이나마 석별의 정을 나누기 위함이었다. 활짝 웃는 모습으로 반기는 이 시장과 접견을 마치고 돌아서는 방문객들은 하나같이 아쉬움이 묻어나는 얼굴로 총총히 사라졌다.
11년동안 천안시장을 맡아온 이 시장의 이임식은 그러나 1시간여. 그가 담고자 하는 말들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남편은 말을 길게 하는 버릇’이 있다던 부인 이정혜 여사는 옆에서 조용히 경청하고 있었다.
“천안시장의 자리는 천안시민의 얼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몸가짐과 한마디 말에도 성직자 같은 마음으로 절제했습니다. 원칙에 너무 충실하려다 보니 경직성으로 비쳐지기도 했습니다. 소신있게 하려다 보니 때로 독선으로 내몰리기도 했습니다. 어려워도 반드시 시장으로서 해야 할 일을 찾았고, 구상했던 일들도 펼쳤습니다. 그리고 후회없이 모든 일을 이루었습니다. 96년 쓰레기 대란에는 죽을 각오를 하고 현장에 뛰어들어 전국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훌륭히 해결했습니다. 시청사 이전도 반대의견이 있을 수 있으나 21세기의 천안?아산 생활권을 생각할 때 반드시 불당동 적합지로 옮겨야 했습니다. 아쉽다면 ‘도시는 농촌처럼, 농촌은 도시처럼’ 조화를 이루길 바람했는데 아무리 해도 미흡함이 남습니다. 도시의 교통문제도 하루 이틀 사이에 해결할 수 없다는 걸 압니다. 재래시장도 시대의 패턴이 달라지며 어려움 속에 있습니다. 난 이제 떠납니다. 성무용 시장이 훌륭히 능력발휘할 수 있도록 시민들이 도와 오래도록 평화롭고 21세기를 주도하는 천안이 되길 바랍니다. 난 이제 영원히 천안사람일 것입니다.”
이 시장은 마지막 문구로 “날아가는 새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는 말을 선택했다.
이 시장 당사자보다 오히려 만감에 사로잡힌 사람은 심대평 도지사였다. 그는 미리 준비했던 말을 접고,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이근영 시장을 꺼내놓았다.
“나무는 그 열매에서 알 수 있고 사람은 일의 성과에서 알 수 있습니다. 난 이 시대에도 진정한 양반이 있다고 믿는 사람인데 바로 이 시장입니다. 이 시장은 꼿꼿하게 인생을 살았습니다. 신념과 소신을 가지고 행정을 펼쳤습니다. 행정하는 사람은 때로 독선도 해야 합니다. 이 시장님과 내가 만난 것은 81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마음을 나누며 진정 능력있고 좋은 사람임을 알았습니다. 93년 11월 정년을 남기고 용퇴한 이 시장님을 나는 95년에 다시 찾았습니다. 95년은 관선이 끝나고 민선의 시대로 전환되는 해였습니다. 난 도지사로 나올 생각임을 밝히고 천안시장은 이 시장님이 나서달라고 말했습니다. 계속 거절하는 이 시장님을 네 번째 찾았고 그때에야 수락했던 사연이 있습니다. 이 시장님같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정말 모든 이에게 귀감이 될 분입니다. 행복하시길 바라고 앞으로도 늘 찾고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이 시장의 떠나는 자리에 시립합창단의 ‘굿바이 ’의 노래가 잔잔한 하모니를 이루며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