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천 황현 선생 영정
매천 황현 선생은 조선초의 명재상인 장수 황씨 황희 정승 가문의 후예로, 1855년 12월 전라남도 광양군 서석촌에서 아버지 황시묵 선생과 어머니 풍천 노씨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높은 소질을 보인 선생은 20대에 서울로 올라가 영재 이건창 선생, 창강 김택영 선생 등 당대의 대표적인 문인들과 사귀며 학문과 사상적으로 성장했고 뛰어난 글 솜씨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두 차례에 걸쳐 과거에 응시한 선생은 34세 때인 1888년 생원시에 합격해 성균관 생원이 됐다. 그러나 당시의 부패한 정치현실을 개탄하며 정치인을 ‘귀신같은 나라의 정신나간 사람(鬼國狂人)’이라 질타하고 구례 만수동의 지리산 자락에서 학문과 교육활동에 매진했다. 그 후 개인적인 경험과 수집한 각종 정보를 토대로 1864년부터 1910년까지 정치· 경제· 문화 등 여러 방면에 걸쳐 활발하게 저술활동을 펼치며 《오하기문(梧下記聞)》, 《동비기략(東匪紀略)》, 《매천야록(梅泉野錄)》 등을 남겼다. 시간순서에 따라 편년체로 기술하는 동시에 중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기사본말체로 서술한 선생의 저작들은 내용이 풍부하고 문장이 수려할 뿐만 아니라 선생 특유의 날카로운 통찰력과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한 과감한 비평이 특징이다. 또한 당시 급변하는 구한말의 정세를 사실 그대로 생생하게 저술해 역사자료로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되자 김택영 등과 함께 중국망명을 시도하기도 한 선생은 을사오적 등 매국노를 규탄하며 〈문변삼수(聞變三首)〉를 짓고 을사늑약에 저항해 순국한 민영환 등을 애도하며〈오애시(五哀詩)〉를 짓는 등 국운에 대한 비통한 심정을 문학적으로 승화시켰다. 한편 교육에도 관심을 보여 1908년에 근대교육을 담당하는 사립 호양학교를 세우는데 크게 기여했다.결국 국권이 피탈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한 선생은 지식인으로서 책임의식을 느끼고 절명시 4수를 남긴 후 자결·순국했다.이에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매천 황현 선생 공적내용 요약 ○ 1889 〈언사소(言事疏)〉를 올려 국정 개혁을 주장○ 1905 을사늑약을 분개하는 애국시 발표○ 1910 경술국치에 반대하여 자결·순국○ 1962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