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소앙 선생이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생도인 아들 시제(뒷줄 가운데), 인제(뒷줄 오른쪽)와 함께 1936년에 촬영한 사진.
조소앙 선생은 1887년 4월30일 경기도 양주군 월롱면에서 함안 조씨 정규와 박필양 여사 사이의 6남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조부에게 한학을 배우고 1902년 성균관에 입학했으며 1904년 황실유학생으로 선발돼 메이지 대학 법학과 등에서 8년간 공부했다. 이때 재일본유학생 단체를 조직하며 국권회복의지를 표출하는 한편 정치?철학 등 다양한 분야의 독서를 통해 실천적 지식인으로 성장했다. 1913년 상해로 망명하며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한 선생은 동제사, 박달학원 등을 조직했다. 또한 ‘대동단결선언’과‘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며 자주독립의 민주국가 건설을 주장하는 등 독립운동세력의 대동단결을 촉구했다. 1919년 4월 임시정부에 참여한 선생은 민주주의 원리에 입각해 임시정부의 헌법인 임시헌장 및 임시의정원법을 기초하는 등 초기 임시정부 수립에 산파적인 역할을 담당했고 이후 국무원 비서장, 외무부장, 임시의정원 의장 등으로 활동했다. 또한 1919년부터 2년간 유럽지역을 순방하며 국제회의에서 최초로 한국의 독립을 승인 받는 등 외교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선생은 독립운동 세력의 대립과 분열이 심해지자 각 단체의 단결과 통일을 위해서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핵심으로, 개인뿐만 아니라 민족간, 국가간에 균등한 생활을 이루자는 ‘삼균주의’를 창안했다. 이는 1930년 창당된 한국독립당의 당의와 당강으로 채택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고, 1930년대 이후 좌우익 독립운동단체의 주요 이념으로 채택됐다. 한국독립당, 민족혁명당, 재건한국독립당 등을 창당하며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주도한 선생은 1940년 중경 한국독립당 창당위원 및 부위원장을 맡아 임시정부를 지지하고 후원했다. 또한 삼균주의에 입각해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작성하는 등 임시정부의 지도이념과 광복 후 민족국가 건설론을 정립하며 독립운동계의 이론가 및 사상가로 활동했다.광복을 맞아 1945년 12월에 귀국한 선생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과 남북분단이 가시화되자 민족문제의 주체적 해결 및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하며 김 구, 김규식 등과 남북협상에 참여했다. 또한 삼균주의의 정책적인 실현을 목표로 삼균주의청년동맹, 삼균주의학생동맹 등을 조직하고 사회당을 창당했다. 1950년 9월 납북된 후 1958년에 서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