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지도자 육성을 목표로 흥사단을 조직하고 활동하던 도산.
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서리, 국내외 민족결속 다져8월의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 선생(1978.11.9∼1938.3.10)도산 안창호는 1878년 11월9일 평안남도 강서군 도롱섬에서 아버지 순흥 안씨 흥국과 어머니 제남 황씨의 3남1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어려서 유학을 공부하다가 청일전쟁의 폐해를 목격하고 실력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껴 서울 구세학당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기독교에 입교했다. 졸업 후 독립협회 관서지부를 설립해 평양 쾌재정의 만민공동회 연설로 명성을 얻은 도산은 독립협회 해산 후 고향에 점진학교와 탄포리교회를 설립하는 등 근대민족의식에 입각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했다. 1902년 미국으로 건너간 도산은 미주한인 생활안정 및 권익신장을 위해 1905년 미주 한인 최초의 독립운동단체인 공립협회를 창설했다. 을사늑약으로 조국이 위험에 처하자 1907년 귀국해 신민회를 결성하고 대성학교 ‘태극서관’ 도자기회사 등을 설립하며 교육 및 산업진흥운동을 전개했다. 1909년 안중근 의거 배후혐의자로 지목돼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중국 청도를 경유해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했다. 1911년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돌아간 도산은 해외 한인사회를 조직적으로 통합해 한인들의 권익보호와 독립운동의 역량을 결집시키기 위해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재정비하고 1915년 초대 회장으로 선출됐다. 대한인국민회는 일제에 대항해 미국에 거주한 한인들을 보호하는 정부와 같은 역할을 담당했을 뿐만 아니라 하와이, 만주, 시베리아 등지에 지방총회와 지방총회 산하 각 지방은 물론 멕시코, 쿠바까지 지방회를 두고 민족운동을 지도하는 등 독립운동을 선도했다. 뿐만 아니라 1913년 5월에는 흥사단을 조직해 미래의 민족지도자를 육성하기도 했다.3·1운동 소식을 들은 도산은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서리로 취임하고 초기 임시정부의 기반을 구축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어 1919년 9월11일 통합임시정부를 출범시키고 노동국 총판에 부임했다. 임시정부가 내분에 휩싸이자 도산은 1923년 여운형과 함께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는 결실을 거뒀다.각 계파와 노선간 의견대립으로 국민대표회의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나 도산은 계속해서 민족유일당 운동에 매진했다. 도산은 북경을 시작으로 중국 관내 주요지역과 만주지역까지 돌면서 독립운동의 대동단결을 호소했다. 뿐만 아니라 1930년 대공주의와 삼균주의에 입각해 한국독립당을 창당하는 한편, 중국과도 공동으로 항일전선을 구축하고자 노력했다. 또한 만주 등을 중심으로 이상촌 건설운동을 추진하기도 했다. 1932년 윤봉길 의거 후 상해에서 일경에게 붙잡혀 옥고를 치르고 1935년 2월에 가출옥한 도산은 일제의 감시를 무릅쓰고 계속해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동우회 사건’배후지도자로 다시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 중 병으로 보석됐으나 1938년 3월10일에 결국 순국했다. 이에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안창호 선생 공적내용 요약◆1905 공립협회 설립 계몽운동◆1907 신민회 설립 국권회복운동 ◆1919 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 ◆1923 국민대표회의 부의장◆1930 한국독립당 창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