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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인년(壬寅年) 호랑이띠 ‘천안은?’

등록일 2022년02월02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호랑이는 단군신화에도 나올 정도로 우리 민족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많은 문헌상에서 사납고 무섭게 묘사되기도 하지만, 보은의 동물로도 자주 등장한다.

<동국세시기>에 보면 우리나라는 매년 정초가 되면 해태, 닭, 개, 호랑이를 그려 부엌문, 중문, 곳간문, 대문에 붙이는 풍속이 있다. 불을 막아낸다는 전설적인 동물 해태는 부엌에서, 어둠을 밝히고 잡귀를 쫓아버린다는 닭은 중문에서, 도적을 지키는 개는 곳간에서, 그리고 집안에 잡귀가 침범하는 것을 막아준다는 호랑이는 대문에서 각기 집안식구들을 지켜주는 영물이었다.

서민들은 누군가 자기를 지켜주는 신령이 있다고 믿었다. 물에는 용왕을, 산에는 호랑이를 신적인 존재로 여겼다. ‘좌청룡 우백호’도 그런 이유다.
우리에게 있어 호랑이는 인간적이며 해학적인 성품을 가진 동물이었다. 칼이나 창을 쥐고 두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는 중국의 호랑이와는 대조된다. 위엄이 있으면서도 무섭지 않다.

‘호축삼재(虎逐三災)’라 해서 화재, 수재, 풍재를 막아주고 병난, 질병, 기근의 세가지 고통에서 지켜주는 힘이 있다고 믿어왔다. 벽사의 뜻으로 그려지는 호랑이는 대나무와 함께 악귀를 향해 정면으로 도전해 물리치겠다는 의지를 나타낸다.

사신도에서 백호는 서쪽을 수호하는 상상의 동물로 나온다. 용, 봉황, 기린, 해태, 천록, 삼두독수리 등 영수들은 모두 여러 동물들의 신체 일부분을 합성시켜 만든 상상의 동물이지만, 호랑이만은 실제의 동물인 점도 특이하다.
 

산신각의 호랑이

천안 성불사 산신각에는 호랑이 그림이 있다. 

조선 후기 산신신앙 형태는 무속과 깊은 연관을 갖는다. 이때는 아직 신앙의 상징물이 그림으로 형상화된 산신도는 없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는 산신각 또는 산신의 성격을 띤 신앙이 전국의 명산이나 사찰, 마을단위나 가가호호까지 모셔지면서 확고한 민족종교와 같은 성격으로 인정하기에 이른다.
 

▲ 천안 성불사 산신각에 있는 호랑이 관련 탱화.


산신각은 밖에서 초와 향을 사르며, 전각 앞에서 제를 올리거나 합장하는 용도로 이용되었다. 산신기도는 정갈하고 부정하지 않아야 효험이 있다고 믿어 단독 기도터가 마련된 것이 산신각이다.

산신각 좌우 벽에는 백호와 청룡을 그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호랑이는 민화속에 등장하는 까치호랑이가 많다. 하지만 산신도의 형상이 어디에서 어떤 연유로 신선과 호랑이가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는지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적어도 초기 산신도(19세기 초)로 보이는 그림의 특징은 호랑이가 등장하지 않는다. 1830년대의 선암사 기호산신도는 호랑이에 기대앉아 있는 조선 후기 전형적인 산신도 형태를 보여준다.

호랑이는 일찍부터 산령숭배의 대상으로 삼아왔다. 산신령의 사자나 또는 산신과 동격의 의미를 부여해 오고 있는 것이다.

‘현대문화의 물결에 밀려 설화문화의 중심인 사랑방이 사라지고 말았다. 사랑방에서 대를 이어 전해 내려오던 설화가 차차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다.’

천안시 향토문화자료중엔 ‘천안의 민담과 설화’라는 책이 있다. 민병달·이원표씨가 1998년 관내 민담과 설화를 수집·정리해 엮은 것이다. 이들은 민담·설화가 점차 사라져가는 것에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천안의 민담과 설화’에는 모두 57개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중 호랑이와 관련된 설화·민담은 4건이 수록돼 있다. 1922년 이후 한국호랑이는 멸종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천안에서는 과거와 현재도 있고, 또한 미래에도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 ‘호랑이 이야기’다.
 

효자 유언겸을 지켜준 호랑이

모친이 작고하자 유언겸은 삼년시묘를 살았다. 한번도 여막을 떠난 적이 없으며, 우물이 멀어 생활이 무척 불편했다. 어느날 호랑이 한 쌍이 여막 앞을 지켰다. 한번은 도둑이 들었는데 호랑이의 포효에 놀라 도망갔다. 염병에 걸린 중도 여막에 오다 호랑이에게 쫓겨갔다. 전염병이 돌자 동네사람들은 ‘역귀가 기름내를 따라온다’는 속설로 일체 제사음식을 차리지 않았다. 유언겸은 효성으로 제수를 차려 동네사람들이 항의소동을 벌였지만 호랑이 때문에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

그같은 효성을 알게 된 조정은 동리 앞에 효자정문을 세워 포양(褒揚)했다. 유언겸 일가 정문이 풍세면 남관리 공수골 마을앞에 건립돼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선조임금이 출천지대효자라고 항상 칭찬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실화로 보는 시각도 있다.

치마바위

삼족이 멸해지는 가운데 아낙네 하나가 도망쳐 나왔다. 포졸들을 피해 산 속으로 숨었다. 호랑이가 어둠 속에서 먹을 것을 건네 주었다. 한참 잠들었다 깨니 옷보따리를 내밀었다. 치마를 벗어던지고 새 옷으로 갈아입자 호랑이는 아낙네를 등에 태우고 산과 들을 지나 남쪽으로 달렸다. 새벽닭 울음소리가 들릴때 어느 초가집에 내려졌다. 거기서 아들을 낳고 여생을 잘 지냈다. 그녀가 도망친 산이 목천읍에 있는 취암산이어서 ‘치마바위’ 또는 ‘며느리바위’라 했는데, 한(恨) 많은 바위로 통한다.
 

효부이야기

옛날에 한 효부가 살고 있었다. 친정이 진천인 이 효부는 병천으로 출가해 남편과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남편이 병으로 죽자, 시어머니는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된 며느리가 재가하기를 원했다. 갖은 핑계를 대며 친정으로 보냈으나, 그때마다 완강히 뿌리치고 시댁으로 돌아왔다. 한번은 친정으로부터 부고장이 날아와 부랴부랴 달려갔다 아닌 것을 알고 잠자리를 마련해달라 했으나, 밤이 으슥할 때 홀로 계신 시어머니가 걱정이 되어 뒤도 안 돌아보고 백여리나 되는 험한 산길을 향해 떠났다. 가는 도중 호랑이를 만나 혼비백산했지만 담대히 자신의 처지를 밝혔다. 호랑이도 감동했는지 그녀를 태우고 쏜살같이 달려 시댁에 도착했다. 과부는 먹다남은 팥죽을 주었다. 며칠 후 웅덩이에 빠진 호랑이를 마을사람들이 잡았다. 과부가 보니 자기를 살려준 호랑이었다. 과부는 사람들에게 호랑이 입 언저리에 팥죽이 묻어있을 거라며 자신의 호랑이임을 밝히며 사람들로부터 구해주었다. 소문이 퍼져 군수 귀에까지 들어가면서 과부는 효부상을 받게 되었다.
 

범이 된 효자

병든 아버지를 모신 어느 효자가 토끼의 간 100개를 들게 하면 나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날 토끼를 쫓다가 산속에서 잠이 들었다. 꿈속에 ‘머리맡에 있는 책을 외우면 범이 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깼는데 정말 꿈속의 책이 있었다. 그로부터 효자는 범이 되어 하루에도 많은 수의 토끼를 잡게 되었다. 마지막 100개째 토끼를 잡고, 이제 사람으로 변신하려는데 찾아봐도 눈에 띄지 않았다. 아내가 책을 태워버렸던 것이다. 아버지는 마지막 토끼의 간을 먹고 병석에서 일어났으나 효자는 범이 된 채 산천으로 돌아다니게 됐다.

김학수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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