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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고지 영웅 ‘오규봉 하사’ 추모

천안출신 오규봉 하사 추모행사, 천안성환초등학교에서 개최

등록일 2021년06월10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천안시재향군인회(회장 방수정)는 9일 오전 천안성환초등학교에서 고(故) 오규봉 하사 추모행사를 개최했다.

이날 행사는 박상돈 천안시장을 비롯한 유가족과 보훈단체장, 육군제9보병사단장 등 군부대, 추모회 등이 참석해 헌화 및 분향을 진행했다.

고 오규봉 하사는 천안 성환읍에서 태어나 천안성환초등학교를 졸업했으며 제9사단의 소총수로 전쟁에 참여했다. 그는 6.25전쟁 최대의 격전지였던 백마고지에서 강승위 소위, 안영권 하사와 함께 박격포탄과 수류탄을 가지고 적진으로 돌격해 진지 3개를 파괴하고 산화한 백마고지의 영웅으로 불리고 있다.
 

박상돈 시장은 “자유와 평화를 위해 혼신을 다해 싸우셨던 백마고지의 용사가 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을 수 있다”며, “누구보다 나라사랑 정신을 실천하셨던 고 오규봉 하사가 우리지역 출신이라는 점이 자랑스럽고, 오규봉 하사의 고귀한 뜻을 계승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가장 치열했던 ‘백마고지전투’

하루에도 몇 번씩 고지주인이 바뀐… 전쟁의 참혹·잔학사

 

백마고지 전투를 영화화한 ‘고지전’의 한 장면.


1952년 10월6일 백마고지 전투가 벌어졌다. 당시 북조선측의 요청으로 휴전협상이 진행되는 중에 현 접촉선이 군사분계선이 될 것을 대비, 쌍방간에 치열한 고지 쟁탈전이었다. 백마고지는 북한강 동쪽에 위치한 독립고지로서 철원, 금화, 평강, 삼각지대안의 교통로를 제압하는 전략상의 주요고지이다.

중공군은 백마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정예 3개사단을 동원해 1만4000여명의 큰 병력이 개미떼와 같이 밀려들었다. 이날 밤 적과 3차에 걸쳐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한 국군은 적에게 많은 피해를 주면서 격퇴시켰다.

다음날 밤 백마고지에 대한 공격을 재개한 중공군에 의해 일시 철수했던 국군은 역습을 감행해 다시 백마고지를 탈환했지만 10월8일 새벽 고지 일대에 안개가 자욱하게 깔리자 적은 제5차 공세를 재개했다. 국군은 사력을 다해 맞섰으나 짙은 안개로 포병 및 항공지원을 제대로 받지못한 가운데 주봉을 적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국군 9사단은 오후 5시 제28연대 제3대대를 투입 또다시 반격을 가해 장장 8시간여의 격전을 거듭한 끝에 밤 11시가 돼서야 마침내 주봉을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동안 치열한 공방전에서 28연대와 30연대는 거의 재편성이 불가피할 정도로 많은 병력을 잃었다.

9일밤 자정이 지나면서 중공군은 또다시 집요한 공격을 개시했다. 3시간여에 걸친 파상공격으로 밀어닥친 적은 새벽 3시경 주봉과 그 우측능선의 일부를 수중에 넣었다. 날이 밝자 사단은 적이 점령한 고지 정상에 1만7700발의 포탄과 항공기에 의한 화력을 집중투하하고 이날 밤 제29연대로 하여금 역습을 전개했다. 연대는 적의 완강한 저항을 물리치고 자정 무렵 주봉을 재차 점령했다.

10일 새벽 적은 정상을 향해 개미떼처럼 기어오르고 있었다. 새벽 4시 무렵부터 피아간에는 수류탄 투척전과 백병전이 전개됐다. 처절한 전투가 전개됐고 9부능선으로 철수한 국군은 제2대대의 증원을 받은 후 역습을 감행, 새벽 6시30분 다시 정상을 탈환했다.

10월11일 밤 고지는 다시 중공군의 수중으로 넘어갔으나 12일 아침 반격해 재탈환했으며 다시 적의 반격을 받아 고지를 빼앗겼다. 이같이 밀고 밀리는 육탄전을 10월15일까지 계속한 끝에 마침내 탈환에 성공했다. 이어 제29연대가 기세를 몰아 395고지 북쪽 낙타능선상의 전초진지를 탈환하게 됨으로써 적을 완전히 격퇴시켰다. 거의 궤멸상태에 이른 중공군 제38군은 예하사단을 철수시켜 전선에서 물러났다.

결과적으로 국군 제9사단은 10월6일부터 중공 제38군의 공격을 받아 연 10여일간 12차례의 쟁탈전을 반복해 7회나 주인이 바뀌는 혈전을 수행한 끝에 백마고지를 확보했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 제38군은 총 9개연대중 7개연대를 투입해 그중 1만여명이 전사 또는 포로가 된 것으로 집계됐으며, 국군 제9사단도 총 3500(부상 2500명)여명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보고됐다.

한편 이 백마고지 싸움에서 전쟁영웅이 탄생했다. 강승우 소위와 오규봉·안영권 하사가 그들로, 이중 천안 성환출신의 오규봉 하사도 있었다.

1951년 12월 오규봉(23) 하사는 부산 피난시 군대에 지원입대해 육군 백마부대 제9사단 30연대 1대대 1중대 3소대 소속으로 철원 백마고지 탈환작전에 참가하게 됐다.

제9사단장 김종오 장군은 제10차 공방전이 끝나자 반복의 쟁탈전으로 변해 장기전이 될 공산이 크다는 것을 깨닫고 이제야말로 마지막 결전으로 승부를 내야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대대적인 공격전략을 세웠고, 연대장 임익순 대령은 고지탈환 선봉을 오규봉 하사 소속인 제1대대(대대장 김영선 소령)에게 맡겼다.

이윽고 10월12일 공격명령이 아침 8시 정각을 기해 내려졌다. 아군 포병이 20여분에 걸쳐 공격준비 사격을 퍼부었고 오규봉 하사 소속인 제1대대는 주봉공격에 들어갔다. 그러나 고지정상을 바라보는 가까운 거리까지 진격한 아군은 더이상 전진을 못하고 고전하기 시작했다. 고지정상까지 오르는 길이 너무 가파로운 데다가 간단없이 쏘아부치는 기관총 때문에 한발도 전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제3소대장 강승우(康承宇) 소위가 비장하게 부르짖었다. “저 기관총 진지만 잠재우면 고지를 탈환할 수 있다. 나와 함께 저 기관총을 잠재울 용사가 없느냐?” 그러자 그의 소대원인 오규봉(吳奎鳳) 하사와 안영권(安永權) 하사가 약진해 왔다.

강승우(康承宇)와 오규봉·안영권 하사는 양손에 수류탄을 빼들고 눈을 부릅뜨고 고지정상에 이르는 가파로운 벼랑사이를 달릴때 적의 기관총은 무차별 사격을 가해오고 있었다. 신들린 듯 육탄3용사는 박격포탄과 수류탄을 몸에 지니고 순식간에 고지 정상까지 진격해 수류탄을 까던졌다. 폭음소리가 연달아 올리며 적의 기관총진지는 완전히 박살났다.

육탄3용사는 기관총 진지 바로 아래 온몸이 벌집처럼 된 채 장렬하게 쓰러졌다. 그 모습을 본 중대원들은 순식간에 고지정상에 진격해 백마고지 주봉 정상에 태극기를 꽂았다.

 

김학수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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