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너 닫기
뉴스등록
맨위로

“따뜻한 햇볕 쬐끔만 쐬면 안될까”

가족은 있으나 불행한 사고 후 홀로남은 97세 노인의 기구한 사연

등록일 2021년03월01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어느날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 그렇게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어요?”
 


97세의 노인은 그렇게 우리들 곁으로 다가왔다. “천·구백·이십·이년·시월·십·팔일”.

연세를 여쭈면 ‘스타카토(한 음씩 매우 짧게 끊어 연주하는 일)’ 같이 또렷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의심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 ‘그럼 올해로 100세는 되시는데….’

노인은 한국 국적이 말소돼 있었다. 게다가 외국인체류자 기간도 종료된 상황. 몸 가누기도 쉽지 않은 나이에 천안교도소를 나와 동가숙서가식 하고 있었다. 집도 없고 사람관계도 없고 돈까지 없는 데다가 국적까지 한국이 아니니 어려운 처지는 누구와 비할까.

신고를 받아 지구대로 인도되곤, 몸이 아프다는 걸 알고 병원에 보내졌다. 돈이 없으니 병원에서 내보내지곤, 또다시 오갈데 없이 아무 곳이나 머물렀다. 날씨도 점차 추워지면서 배고픔과 추위는 차치하고 건강마저 현저히 나빠져 갔다. 그 와중에 천안시청에서 통합사례관리사로 근무하는 김진숙씨를 만난 것은 다행이었다.

매사에 열의있는 김씨는 그런 노인을 나몰라라 할 수가 없었고, 노인은 그런 김씨 도움이 절실한 상황. 좋은 인연의 끈이 연결된 것이다.

노인이 가지고 있는 여러 조건들은 시설이나 쉼터 등의 입소가 어려운 사각지대에 있었다. 예로 보호자가 필요한 쉼터생활은 불가능했다. 김씨는 “한번은 여관에서 잠시 머물렀는데 2층에서 1층까지 혼자 내려오시는데 30분은 걸리신 거 같다”고 했다.

김씨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노인을 추적했다.

“어르신을 알아야 도움도 드릴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연관된 것이 아무것도 없었죠. 그나마 방법이란 것이 그분의 행적을 하나하나 뒤로 짚어가는 것이었죠.”

조금씩 베일을 벗기자 노인의 실체가 희미하게 드러났다.

노인이 기억하는 자신은 ‘북한사람’으로 6·25 전쟁과 함께 남한으로 내려왔고, 우리가 말로만 듣던 거제포로수용소를 직접 경험하기도 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포로들 무조건 석방시켜라. 가을철인데 미군들이 알까봐 한국군인들이 기관총으로 다다다다 쏘아댔지. 사람은 맞추지 않았어. 미리 철조망을 다 끊어놓고서, 그리로 도망치라는 거야. 나도 논둑으로, 밭둑으로 죽을 힘을 다해 도망쳤어.”
 

노인의 말은 진짜일까. 그가 걷어붙인 왼팔에는 아직도 선명하게 <1950.10.1.>이란 숫자가 문신처럼 새겨있었다.

이후 먹고살기 위해 다시 군인이 됐다는 그. 이번엔 한국군인이 되어 논산훈련소 11기로 포천6군단에 있었다고 했다. 63년 제대한 후 오갈 데가 없어 의정부에서 안해본 게 없다는 그는 “똥지게까지 지었어” 한다. “한 집 치우는데 8000원이었지.” 그러다 건축일을 하는 사람을 만나 일을 열심히 배웠고 이제는 사람행세도 하며 먹고살 만 해졌다고 했다.

 
“희망? 그런 것이 있겠나?”

노인은 가족이 있었다. 자녀들도 여섯이나 있어 셋은 한국에, 셋은 미국에서 살고 있다.

“미국에서 손주들과 살았지. 귀여운 손주들이야. 보고 싶은데….” 하지만 한국에 왔다가 체류자격은 지났고, 미국시민권자이지만 돌아갈 수가 없다. 무엇보다 반겨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김씨는 “침해도 있으신 거 같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언제부터인가 가족간 불화가 몹시도 컸다. 노인의 기억이 배배 꼬인 날이었는지, 큰 다툼이 있고 ‘살인미수죄’로 3년간 감옥살이를 하게 될 줄이야. 가족이야기에서는 언뜻언뜻 분노에 찬 눈빛을 보게 된다. 노인은 가족간 관계를 ‘불화’라 했다. 누구의 잘못인지는 이제 와서 중요하지 않다. 그저 서로의 마음에 아픔이 배여있을 뿐.

실제인지 허상인지, 제정신인지 아닌지…, 가족관계의 복잡한 사연에 늙고 병약한 심신의 상태까지 맞물려 알 길이 없다. 그의 좋은 기억이란 그저 자녀들이 어릴 때의 모습이다. “예쁘고 귀엽고, 공부도 잘 했지” 하고.

노인은 가족이 있으면서도 이제는 ‘혼자’다. 그 난리를 겪고 최근 감옥에서 나왔으니 가족간의 관계는 더욱 희미해졌다. 대부분 경제사정도 썩 좋지 못하다 보니 요양병원이라도 들어가시면 조금 보태겠다는 것은 그나마 가족의 정을 뿌리채 도려내지 못해서다.

“남은 날이 얼마나 될지는 몰라도 평안한 마음으로 사셨으면 좋겠어요.”

노인에게는 그간 병원이다 요양원이다 하며 생활하다 밀린 빚이 있다. 김씨는 백방으로 문을 두드리며 빚을 탕감해가고 있지만 역부족. “빚이 없다면 요양병원에 모시고 가족들과 어찌 해보겠다”는 김씨지만 100세에 가까운 오갈데 없는 노인 보호하기가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상황이다.

“조금만 주위에서 도와주시면 어르신네도 좀 편안히 생활하시도록 할 수 있으련만…, 천사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40대 초반 질병이 찾아와 그 후로 다리에 힘이 없다는 노인. 그 몸으로 끝도 없는 황량한 들판을 걸어왔다. 아직도 걸어갈 길이 남아있다. 현실에서 내쳐지면 내쳐지는 대로 살아간다는 생각 뿐이다. 모진 바람도 불어온다. 저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김학수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관련뉴스 - 관련뉴스가 없습니다.
유료기사 결제하기 무통장 입금자명 입금예정일자
입금할 금액은 입니다. (입금하실 입금자명 + 입금예정일자를 입력하세요)

가장 많이 본 뉴스

종합 뉴스 라이프 우리동네 향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