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얼마나 많은 3·1운동 활동이 있었을까.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시점에서 독립기념관(관장 이준식)이 북한지역 3·1운동 사적지 전수조사를 마쳤다. 2016년부터 3개년 사업으로 북한 전역을 6개 권역으로 나눠 일제 탄압자료인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 3·1운동 참여자 판결문 등을 토대로 사적지를 조사했다.
그 결과 문헌상으로는 적어도 812개소의 3·1운동 사적지가 북한지역에 산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해서지방(황해도) 158개소, 관서지방(평안도) 215개소, 관북지방(함경도) 281개소를 비롯해 경기·강원 양도 북한 편입지역 158개소(경기75, 강원83) 등이다. 만세시위현장이 거리인 경우가 475개소, 산야 16개소, 일제 탄압기관 건물이 244개소, 그리고 거사주역들이 시위를 계획하던 거주가옥 77개소로 분류된다.
북한지역 3·1운동 대표사적지
북한지역의 대표적이고 특징적인 만세시위 사적지는 사천(평남 강서군, 일명 모락장), 맹산(평남 맹산군), 성진읍(함북 성진군), 해주(황해도), 송도(경기도 개성군) 등으로 나타났다.
<평안남도>
3월1일에 만세시위가 전개된 지역은 평양, 진남포, 안주 3곳이다. 평양의 만세시위는 기독교(장로교·감리교)와 천도교에서 각각 추진했다. 2월12일 이승훈은 평양 기독교서원에서 평양시위를 위한 준비모임을 가졌으며, 평양 기홀병원에 입원해 기독교 지도자들과 만세시위를 준비했다. 3월1일, 장로교에서는 장대현교회 앞마당인 숭덕학교 교정에서, 감리교에서는 남산현교회, 천도교에서는 시내 설암리 천도교구당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시내로 진출해 합류했다. 3개 종교단체 주도로 시작된 만세시위는 평양대로를 행진하고 평양경찰서 앞에서 혈성가와 독립만세를 외치며 대치했다. 일경은 군중 해산을 위해 소방대를 동원했고, 성난 군중의 투석으로 경찰서 유리창이 깨졌다. 이를 빌미로 한 일경의 발포와 피체과정에 더욱 분격한 군중들과 난투극이 벌어지자 일경은 쇠갈고리로 시위대를 구타해 무수한 부상자가 발생했으며 수백명이 피체됐다.
3월4일에는 대동군 금제면 원장에서 만세시위가 있었다. 강서군 반석면 사천시위(모락장만세운동)로 이어진 만세시위로, 평안남도 3·1운동의 가장 투쟁적이고 특징적인 만세시위로 평가된다. 반석교회 장로 조진탁의 주도로 일어난 원장~사천간 만세시위는 일군경과 군중들의 유혈투쟁으로 현장사망자만 해도 19명, 부상자도 40여명에 달했다. 무차별 발포로 사망자가 속출하자 격분한 시위대가 총격자들을 색출해 처단했다. 일제의 본격적인 시위 가담자 색출 과정에서 78명이 체포됐고 이들은 조사과정에서 끔찍한 악형을 당했다. 이 만세시위로 조진탁, 송현근, 차정신, 최능현 등 4명이 사형선고를 받았고 5명이 무기징역, 11명이 징역15년의 중형을 받았다. 조진탁은 사형이 언도돼 평양감옥에서 순국했으며, 현장 순국자 이외에도 최승탁, 이혜준 등 12명이 고문으로 옥사하거나 고문여독으로 출옥 후 바로 순국했다. 이외에도 강서군에서는 3월3일 기독교·천도교 연합만세시위에서 일군경의 발포로 사망자 9명과 부상자 4명이 발생했으며, 4일 증산면 구읍에서는 시위대가 헌병주재소를 공격해 헌병과 보조원 4명을 처단하는 등 격렬한 유혈투쟁이 곳곳에서 전개됐다.
중화군 상원 신읍에서는 3월2일 천도교인들이 주축이 된 시위대가 경찰관 주재소의 철거를 요구하며 총기와 탄약을 탈취하고 오후에는 기독교·천도교, 주민 수천명이 구금된 사람들을 탈환하기 위한 격렬한 시위로 사상자가 발생했다.
맹산군에서는 일제의 야만성이 민낯으로 드러난 집단학살이 일어났다. 맹산군에서의 만세시위는 3월 6일과 10일에 걸쳐 비교적 큰 충돌없이 전개됐으나 헌병분견소에서 기독교계 교사를 피체·고문하자 격분한 군중들이 몰려가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헌병분견소장이 평화로운 해결을 제의하며 주민 56명을 분견소 내로 불러들이고는 무차별 난사를 자행해 50여 명이 그 자리에서 학살당했다. 3·1운동 역사상 단일장소에서 최단시간 최다의 피살자가 발생한 사건이다.
<평안북도>
선천군에서는 이승훈의 지도에 따라 신성중학교에서 시작됐다. 신성학교와 보성학교 학생을 포함한 1000여명의 시위대가 선천수비대와 충돌해 부상자가 발생하고 100여명이 피체됐다. 선천 읍내에서는 3월4일 장날을 기해 만명의 시위대가 일경과 충돌해 6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3월5일에는 평북 전역으로 만세운동이 확산되면서 이날 하루만 해도 9개군에서 총 14건의 만세시위가 발생했다. 선천에서는 4개면 5개지역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는데 신미도(身彌島)에서는 불과 30명의 시위대가 헌병주재소와 면사무소를 20일간 점거하고 자치적인 행정사무를 집행하기도 했다.
삭주에서는 3월5일 청사까지 가두행진하던 시위대와 헌병대의 충돌로 4명이 현장순국하고 20여명이 피체됐다. 3월31일과 4월1일에는 2000여 명의 시위대가 헌병분견소를 공격했다. 삭주군 외남·대관면에서는 4월6일 6000여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만세시위가 일어났으며, 200여 명의 결사대를 선별해 일본군의 탄압에 맞서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6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40명이 피체됐다. 또한 3월31일 정주 천도교구에서도 장날을 이용해 정주읍내에서 만세시위를 계획했다. 각 지역에서 몰려든 시위대가 정주우편국 앞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했는데 일본헌병들의 무차별 발포로 이날 희생된 사람만 92명에 달하고 72명이 피체된 것으로 파악된다.
<함경남도>
원산 3·1운동은 이가순과 이순영 등이 주도했다. 이가순은 3월1일 오후 2시경 원산리 시장에서 군중들에게 독립에 관한 연설을 하고 참여를 권유했다. 이어 수천명의 군중과 함께 원산 시가지를 행진하면서 만세행진을 전개했다. 이날 주도인물을 포함해 50여명이 체포됐다. 3월18일에도 1000여명의 군중이 만세운동을 전개했으며, 기독교도와 천도교도 40여명이 검거됐다.
정평군에서는 3월 7일부터 20일까지 부내면, 주이면, 춘류면, 선덕면, 고산면, 장원면 등에서 24차례에 걸친 만세운동이 전개됐다. 특히 고산면에서는 3월 16일부터 20일까지 5일간 11차례에 걸친 만세운동이 있었으며, 한동리는 군 소재지에서 멀리 떨어졌는데도 독립만세에 참가한 인원이 5000명에 이르렀다 한다.
함흥군에서는 3월3일부터 시작해 4월8일까지 함흥면 등 12개 면에서 20회에 걸쳐 독립만세를 외쳤고 이외 독립만세운동의 권유활동, 학생들의 동맹휴업, 유인물 배포, 방화 등 다양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일제는 함흥에서 만세운동을 근절시키기 위해 야간통행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다. 함흥시내 각처에서 수감된 인사들이 150~160명에 이르렀으며 이중 41명이 기소됐다.
북청군에서는 천도교를 중심으로 3월8일부터 4월9일까지 노덕면·신창면·양천면·양화면·상거서면·거산면·속후면 등에서 16차례 만세운동이 전개됐다. 이외에 유인물 제작과 배포, 2개 면사무소에 방화활동, 학생들의 동맹휴업 시도가 있었다. 또한 일제의 사전탐지로 실행에 옮겨지지 못한 것도 3차례가 확인된다.
신흥군에서는 3월 9일부터 17일까지, 그리고 3월31일에 동고천면, 가평면, 원평면, 영고면, 동상면, 상원천면 등에서 16회에 걸쳐 만세운동이 전개됐다. 3월10일에 있었던 만세운동은 신흥보통학교 4학년 학생(유춘갑)이 주도한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그는 3월10일 학교 구내에서 약 170명 학생들에게 만세운동을 권유하고 선두에 서서 구한국국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학생들을 이끌고 흥경리 일대에서 행진하던 그는 체포돼 징역 8월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함경북도>
길주군은 함경북도 남단에 위치한 관계로 비교적 일찍 3·1운동이 일어났다. 천도교 의사원인 이태인은 길주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고, 9일 밤 길주군 장백면 도화동에 위치한 이용서 집에서 동지들을 규합해 천도교도를 중심으로 12일 길주읍 장날을 이용해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계획했다. 12일 길주 우시장에서 1000여명이 참석해 길주시내에서 시위했으며, 이후에도 10여 차례나 일어났다. 특히 3월13일은 덕산면과 동해면 등지에서 5회나 일어났다. 동해면에서의 시위는 14일까지 이어졌고 주민 1500여명이 참여했다. 길주헌병대에서는 총을 난사해 이날 현장에서 3명이 즉사했다.
명천군의 시위는 길주의 영향을 받아 일어났다. 하가면에서는 3월14일 5000여명이 시위에 참가했고 헌병대의 무차별 사격으로 5명이 현장에서 순국했다. 시위는 15일까지 이어져 면사무소를 향해 행진하였으며, 주도자들이 대거 체포됐다. 3월 하순부터는 시위의 규모는 적어졌지만 4월 중순까지 계속됐다.
성진지역에서의 만세시위는 3월10일 시작됐다. 이날 시위는 그리어슨(Robert Grierson) 목사가 운영하는 욱정교회 기독교인들이 주축이 돼 일어났다. 3월10일 오전 10시 그리어슨 목사가 운영하는 제동병원 앞에 5000여명의 군중이 운집했고, 시위군중은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가를 행진했다. 사태가 확대되자 나남 보병 제37여단은 장교 1명과 사병 20명을 성진에 파견해 시위대를 진압했다. 성진읍내의 시위는 인접지역으로 번져 3월 12일부터 14일에 걸쳐 학동면으로, 15일에는 학성면으로 파급돼 전개됐다.
<황해도>
황해도 대표 만세시위는 해주군 해주읍의 시위를 꼽을 수 있다. 이곳은 3월1일에 이미 만세운동 시도가 있었던 곳이고, 다음날인 3월2일 시위가 일어나 황해도에서 최초로 만세운동이 일어난 지역 중 하나다. 더욱이 해주읍 시장까지 포함한다면 이곳에서 일어난 시위만 6회에 달하기 때문에 단일 사적지로는 황해도 지역에서 가장 많은 시위가 일어난 곳이다. 그런 맥락에서 황해도 3·1운동의 중심지로 볼 수 있다.
해주읍 시장은 황해도 3·1운동 사적지에 있어 ‘시장’ 유형을 대표하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시장 외에도 ‘남본정예배당’은 황해도 3·1운동을 대표하는 또하나의 사적지로 언급할 수 있다. 이곳은 기독교 교회로 3·1운동이 일어난 대표적 사적지로 손색이 없다. 3월2일 기독교인들이 회집해 만세를 일으켰다는 점에서 황해도 최초의 시위가 일어난 장소이기 때문이다. 황해도지역은 기독교도의 활약이 많이 있었던 곳이기 때문에 종교적 차원에서도 상징성이 있는 것이다.
시위의 상징성이란 측면에서는 3월3일 수안군 수안읍 시위가 일어난 수안읍내 천도교교구실도 중요한 사적지이다. 시위 참여인원은 200여명에 그쳤지만 이곳에서 촉발된 시위는 일제 헌병의 퇴거를 요구하는 등 시위의 목적성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더욱이 이 과정에서 많은 희생자까지 발생해 시위의 상징성이 커졌다.
4월9일 시위가 일어난 서흥군 매양면 녹안리 헌병주재소도 주목되는 곳이다. 이날 시위에는 약 500명이 참여했는데, 일제의 대탄압으로 6명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한 가운데 무려 61명이 체포됐다. ‘헌병주재소’가 일제 시위대 탄압의 전초기지라는 점에 걸맞게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경기도>
경기도 개성군 송도면에서는 1919년 3월 3일부터 4월7일까지 지속적으로 3·1운동 만세시위가 전개됐다. 3월3일에는 1500여명의 군중이, 같은 날 호수돈여학교에서는 학생 35명이 일대에서 만세시위를 펼쳤다. 3월4일에는 한영서원 생도들이, 오후에는 600명의 시위대가, 오후 8시경에는 약 2000명의 군중이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3월5일에는 약 600명의 군중이 시위운동을 시작했으며 3월7일에는 약 700명의 군중이, 3월23일에는 개성을 중심으로 주위 12개소에서 200명~400명의 군중이 봉기해 오후 11시 경까지 만세시위를 하고 해산했다. 4월1일에도 100명~300명의 군중이 만세운동을 펼쳤으며 헌병이 발포해 쌍방에 약간의 사상자가 발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