촐라체는 에베레스트에서 동쪽 방향에 있다. 에베레스트 옆에 로체가 있고 눕체가 있으며 다음으로 푸모리, 춤부, 로부체, 다음으로 촐라체가 있다.
그런데 웬 생뚱맞은 '촐라체'냐고....
그곳엔 상민과 영교가 있기 때문이다.
상처받은 영혼들, 사랑에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
그리고 마지막 수단인 목숨줄을 내놓고 삶과 죽음의 줄타기를 해야만 하는 처절한 몸부림이 있기 때문이다.
<히말라야에 사는 사람들은 5천미터가 넘는 산도 일반적으로 '마운틴'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 정도의 산은 '힐'이라고 부른다. 인생에서 만나는 고틍스런 굽잇길도 그저 언덕이라고 부르면서 환하게 넘고자 하는 본원적인 낙관주의야말로 살아있는 것들이 가진 존의 빛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이야말로 절대로 훼손되지 않는, 존재가 품고 있는 영원성이다.>
작가 박범신이 밝히듯 소설 '촐라체'의 서사구조는 간명하다.
아버지가 다른 형제가 촐라체 북벽에서 6박7일간 겪는 지옥같은 조난과 놀라운 생환과정
그 속에서 야성과 인간한계의 벽을 넘어서려는 사나이들의 투혼이 있다.
'촐라체'는 그 죽음의 사투라는 놀라운 흥미거리가 읽는 내내 긴장감을 전달해주지만, 그런 정도의 이야기라면 수많은 작가들에 의해 숱하게 널려있기도 하는 평이한 줄거리일 뿐이기도 하다.
난 읽는 내내 '촐라체'에 대한 의문을 갖는다.
-도대체 뭐야?-
박상민과 하영교도, 전인미답 단독등반한 유한진도, 화자인 나도, 모두 운명의 수레바퀴에 짓눌려 신음하는 인물들이다. 기껏해야 삶의 무게를 못이겨 도망치듯 촐라체를 찾은 이들. 산과 마주하고서야 자신을 돌아보게 된 사람들은 모두 나약한 인물이기도 했다.
-나약함이란 뭘까?-
그건 내 존재성과 자긍심을 잃어버렸을 때다.
나는 종종 그 존재성과 자긍심 한자락만으로도 평생을 살아가는 힘을 얻은 이들을 봐왔다.
'타이타닉'이 그랬고 '메디슨카운티의 다리'가 그랬다.
'백년동안의 고독'도, '독일인의 사랑'도, 그리고 영화 '서극의 칼'에서도....
그러고 보면 사람은 어떤 추억을 가질 수 있는가에 존재이유가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난 이를 맹신하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다행히 '촐라체'는 해피엔딩'이다.
그들이 살아돌아와서도 아니고, 겨우 손가락과 발가락을 절단한 채 목숨을 부지해서도 아니다.
바로 '촐라체'라는 아름다운 추억이 평생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그들 생명줄에 기름을 칠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촐라체는 더이상 외부적인 대상이 아닌, 상민과 영교와 화자의 마음속 촐라체가 돼버렸기에...
그들이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