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는 서울 낙원동에서 악기점을 운영하며 ‘호시절’이 있었다. 돈을 잘 버니 부러울 것도 없었다. 하고 싶은 대로 살았다. 사람을 잘못 만나 아파트 두 채를 날리고 빚을 잔뜩 지기 전까진…. 부자에서 가난뱅이, 모든 잘 되던 때에서 불운이 겹쳐지는 때. 실망을 넘어 절망에 빠졌을때 문득 고향집이 생각났다. 빈털터리로 천안에 내려온 것이 1995년 쯤이었다.
이재경(69)씨는 그렇게 천안에 내려왔지만 막막했다. 어떻게 살아갈지 고민에 빠졌다. 마땅한 재능도 없는 상황.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다. “표고버섯? 그게 돈 좀 된다지.” 뭔가 한줄기 희망이 비쳤다. ‘그래, 내가 할 일은 표고버섯을 키우는 일이야.’
95년 천안에 내려온 그 해, 동면 산기슭에 부지를 얻어 표고버섯을 시작했다. 종균을 배양한 원목들을 비닐하우스 안에 설치하고 동분서주하며 소망을 키워나갈 즈음, 아무리 기다려도 나와야 할 버섯이 안보였다. ‘절망’에 또다시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당시 20㎏쯤 나가는 원목 하나를 매고 4㎞쯤 되는 곳을 걸어 시내버스를 탔어요. 제 정신이 아니었죠. 농업기술센터를 찾아 원목을 보여주며 무조건 살려달라 했죠. 그때 인연이 된 사람이 지금의 박상돈(연구보급과) 과장이었어요.”
박 과장은 당시 표고버섯 농사를 연구하고 가르치던 업무를 맡고 있었다. 무조건 나만 믿고 하라는 대로 해달라는 말에서 ‘비빌 언덕’이 생겼음을 스스로 위안했다. “하지만 얼마나 혼났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할 거면 하지 마라’는 말을 들었을 땐 다 때려치울까도 생각했어요. 나이도 한참 어린 사람에게 듣고보니 부아도 났고요.”
지금 생각하면 그러지 않길 천만다행. 한번은 가만 생각해보니 ‘다 나를 위한 말이 아닌가’ 하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때부터 무조건 순종하고 버섯재배에만 집중했다. 박 과장도 당시를 회상하며 “이 분 하나로 다른 농가들도 다 망할까 우려했죠. 농가들은 뭣도 모르고 따라하는 습성이 있어요. 잘못하다가는 상당한 피해가 발생하게 돼요.”
이후 모든 게 순탄히 흘러갔다. 표고버섯으로 돈도 벌었다. 빚도 갚고 땅 3000㎡도 샀으며 멋진 농가주택까지 지었으니 어느덧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행복한 삶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다만 2012년 지붕에서 떨어져 4년간 병원신세를 진 것은 또다른 불행이다. 인생이 순탄하기만 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2년간 죽만 먹고 살았더니 몸무게가 정말 35㎏까지 떨어지더라구요. 4년간 벌지도 못한 채 쓰기만 했으니 경제형편도 많이 위축된 상태.
2017년 몸이 회복되자 다시 농장일을 시작했다. 일을 시작하니 오히려 몸이 개운했다. 사고로 죽다 살아났기에 ‘덤으로 사는 생’. “이젠 즐겁게 살 겁니다. 욕심도 부리지 않을 겁니다. 몸 건강한 게 최고예요. 가정도 화목해야죠. 하고 싶은 일도 미루지 말고 맘 가는대로 살아갈 겁니다. 작년 버섯농사가 잘됐어요. 올해도 유기농 표고버섯들이 무럭무럭 크고 있습니다.”
그가 표고버섯 하우스 앞 바위에 앉아 하모니카를 꺼내들었다. 전국 하모니카동우회 소속이면서 가끔 무대에서 연주도 한다. 솜씨는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