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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세미나- 고려시대의 천안은?

8일 천안박물관 대강당… 목천의 지방세력, 천안의 고려사찰 등 다뤄

등록일 2017년09월10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천안지역의 역사. 지역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이 없다보니 지역을 공부하기 좋은 기회가 되는 역사세미나라도 ‘구체적으로’ 다가서는데 한계를 보여준다.

천안시와 가경고고학연구소는 8일(금) 오후 1시30분 천안박물관에서 학술대회를 가졌다. ‘왕건, 신도시 천안을 건설하다’는 학술대회는 70명 정도가 경청했다. 20여명의 내빈은 축사자리가 끝나고 무대에서 ‘기념촬영’을 가진 후 대부분 자리를 떠났다.

주제발표는 모두 4개. ▷고려태조대 목천의 지방세력과 천안(김갑동/대전대학교) ▷고려시대 천안지역의 왕실불교(김명진/경북대학교) ▷천안출토 청동왕건상의 특징과 상징성(정은우/동아대학교) ▷천안지역의 고려시대 교통로(이판섭/가경고고학연구소)를 발표했다.

구본영 천안시장은 “이번 학술대회가 우리지역의 역사문화 정체성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오규진 가경고고학연구소장은 “태조 왕건과 천안의 모습을 보다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첫걸음이 될 것”이라 했다.
 

축사가 끝나고 인사들의 기념촬영.

 


김갑동 “목천에 가축성을 내려준 왕건”

목천지역은 원래 백제의 대목악군이었는데 통일신라때 대록군으로 고쳤고, 고려에 목주(木州)가 됐다. 군에서 주로 승격할 수 있었던 것은 목천지역이 고려왕조에 협조한 대가였다. 태조 왕건은 군·현의 승강을 통치수단으로 삼았다. 자신에게 비협조적이거나 항거한 지역은 격을 강등했지만, 협조적이거나 공로를 세운 지역은 승격시켰다.

그러나 고려왕조 성립 초기에는 반란세력에 휩싸이기도 했다. 청주지역과 지리적으로 가깝고 후백제와의 접경지대에 있었던 목천지역은 청주의 반란에 참여했고, 이후에도 후백제군이 청주에 쳐들어왔을 때 협조했다. 왕건은 목천지방 세력에게 가축을 뜻하는 한자, 우·마·상·돈·장 등을 성으로 삼게 했다. 그러다 청주반란이 진압되고 중앙군이 주둔하면서 청주의 통제를 받게 했다. 태조12년에 이르러 천안에 도독부를 설립할 때 지방세력 일부가 도독부 설립에 참여했고, 대가로 목주로 승격했던 것이다. 태조23년이 돼서야 목천에 내려줬던 가축성을 정상적인 성씨로 바꿔줬다.
 

김명진 “고려와 관계깊은 천안사찰들”

천안의 사찰은 고려왕실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었다. 유려왕사, 마점사, 천흥사, 홍경사, 개천사 등에서 이를 알 수 있다.

태조 왕건에게 도움을 준 사찰은 왕자산(태조산)의 유려왕사와 마점사였다. 천안부를 설치할 즈음에 왕건은 유려왕사에 유숙하고, 그의 말은 마점사에 맡겼다. 936년 9월 왕건의 고려군은 후백제를 상대로 통일전쟁의 마지막 전투인 일리천 전투를 벌였는데, 그 준비기지가 천안부였다. 1만명의 병사가 훈련한 곳이 왕자산 일대였는데, 힘든 훈련과정 속에서 군사들에게 정서적 평안을 줄 수 있는 곳이 유려왕사와 마점사라 본다.

천흥사는 태조 왕건과 직간접으로 연관된 사찰로, 현종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천흥사는 번창하며 고려왕실과 연을 이어갔다. 또한 봉선홍경사는 현종의 특별한 관심 속에서 창건됐다. 이곳은 길의 요충지였지만 무성한 갈대숲이 있어 강도를 자주 만나는 장소였다. 현종은 아버지를 위한 사찰(봉선홍경사)을 짓고, 행인들을 위한 숙소 ‘원’을 함께 두었다.

고려 후기에는 광덕산의 개천사가 고려왕실과 깊은 인연을 이어갔다. 개천사는 의종의 딸과 혼인한 왕면이 시주해 다시 창건됐다. 무신정권기였던 당시, 왕면은 개경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진 개천사의 불사를 지원하는데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개경 근처에서 대규모 불사를 일으킨다면 무신 집권층들의 눈 밖에 날 수 있었다.
 

정은우 “목천에서 발견된 청동왕건상”

2016년 6월 천안 목천읍 일대 산 중턱에서 발견된 청동상은 얼굴 일부만 남았지만 개성에서 출토된 청동왕건상과 유사한 관을 쓰고 있는 점에서 왕건상일 가능성으로 주목받았다. 청동상은 왕건이 천안에서 활동했던 내력, 천안소재의 왕건 관련 유적과 지명 등과 함께 왕건의 초상조각일 가능성이 높아진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청동상은 목 밑으로 신체는 없어진 채 관의 일부와 얼굴만 잘 남아있다. 얼굴은 정면향에 약간 밑을 향한 시선처리를 하고 있으며, 수염은 있지만 젊은 인상을 하고 있다. 이마가 넓고 턱으로 올수록 좁아지는 얼굴형에, 옆으로 길고 큰 눈과 궁형의 눈썹, 똑바른 콧날에 짧은 코 등 고려전기 불상에 나타나는 조각기법이다.

왕건상은 통천관이라는 황제의 관을 쓰고 있는 점이 특별하다. 특히 관의 금박산 안에 ‘王(왕)’자가 선각된 사실에서 존재감이 더욱 큰데, 당시에는 왕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었을 것이다. 제작시기는 개성에서 출토된 왕건상과 같은 10세기로 추정된다. 이는 광종 이후로서 왕건에 대한 추모와 신성시가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숭배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천안출토 왕건상은 사실적으로 재현된 점과 천안에서 직접 대면할 수 있게 된 점이 가장 큰 의의로 생각한다.

김학수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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