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이 간다. 벌써 꽃이 피고, 진다. 6부능선은 넘었을까.
여름과 겨울이 길어진 반면, 봄과 여름이 짧아졌다. 그로인해 4계절의 균등한 힘이 점점 깨어져 간다. 점차 열대야로 변화하고 있는 기후가 걱정된다. “봄인데도 햇볕이 따갑네요.”
평생동안 수집해온 고서가 빼곡하게 꽂혀있는 그의 서재에서.
천안 광덕면 광덕리로 이사온 건 5년 전. 아내를 졸라 산골짜기로 들어온 조창열(58)씨.
‘만복골’이라는 마을 제일 상류에 자리를 잡았다. 천안에서 고등학교 한문선생을 해오다 2년 전인 2015년 9월 퇴직한 뒤 한가롭게 노닐고 있다. 마당 한켠에는 공부하는 정자라는 뜻의 ‘이문정(以文停)’을 두고, 서재는 그의 호를 따 ‘춘호(春湖)재’라 했다.
공부하는 밑바탕이 어디 가겠는가. 그의 아내는 아직 중학교 사회선생으로 근무중이다. 나이를 먹으면 도심에서 벗어나 자연속에 전원주택을 짓고 사는 것이 대부분의 꿈이듯 그도 그속에서 꿈을 이뤘다.
산골짜기로 들어온 한가지 이유를 덧붙이자면 ‘녹내장’ 때문인지도 몰랐다. 눈에 문제가 생기고 있음을 알아챈 것은 오래 됐으나, 제대로 고치거나 관리하지 않았다. 별일 있겠나 ‘간과’한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
사물의 식별은 어렵지 않으나, 앞이 뿌연 형체로 보이는 통에 정작 글을 읽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해져 버린 것이다.
10년 전부터 조금씩 안좋아지더니, 고쳐보자 마음먹고 병원에 찾아가니 이젠 고칠 수 없는 상태란다. 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다. “다행히 이곳에서 생활하다보니 더 나빠지지는 않아요. 이 방면에 의학기술이 좋아지고 있다 하니 세월 믿고 좀 기다려 봐야죠.”
그런 그에게는 남에게 없는 특이한 보물이 있는데, 평생을 수집해온 ‘고서’가 그것이다.
1층 서재를 온통 채우고도 모자라 2층 방에도 빼곡하게 꽂혀있다. 자칫 흐지부지 없어질 그의 고서는 얼마 전 국회도서관 목록작업을 거쳐 책이름과 개요가 담긴 책으로 엮기까지 했다.
“고서를 사기 위해 집사람에게 월급 한 푼 갔다준 적이 없었죠. 미치지 않고 제대로 할 수 있는 건 없나 봅니다. 미치지 않으면 안돼요, 안돼.” 그럼에도 아내와 딸 둘에 아들 하나는 참 잘 커줬다. 회한보다는 만족에 가깝지만, 자신의 삶을 되돌이켜 보면 그게 정상적인 것은 아니라는 걸 스스로도 잘 안다.
“제가 앞으로 하고 싶은 건 딱 하나 있어요. 내 힘으로 ‘선비박물관’을 만들고 싶다는 겁니다. 우리나라 선비문화는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어요. ‘선비’가 글만 읽는 양반처럼 생각되지만, 선비문화는 실제 올바른 사회윤리를 배우고 그것을 실천해나가는 행동양식입니다.”
34년간 선생경력을 갖고 있는 그가 한숨을 쉰다. 자라나는 학생들은 예나 지금이나 선생을 통해 배우고 익히는데, 언제부터인가 제대로 된 ‘선생’을 찾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바르게 자라는 것. 바르게 자라게 하는 것. 이를 위해 잊혀진 선비문화는 다시 제고돼야 한다는 생각을 갖는다.
그가 말하는 선비박물관은 몇몇 소장품 깔아놓고 푯말만 세운, 그런 작은 단위의 박물관이 아니다. 제대로 갖추고, 교육까지 이뤄지는 ‘규모있는’ 박물관을 구상하고 있다. “물론 그럴려면 제 힘만으론 안됩니다. 많은 분들의 도움과 관심, 격려가 필요하죠. 그렇지 않음 ‘구상’만으로 끝날지 몰라요. 하하.”
그는 틈틈이 천안향토사를 연구조사해서 지역의 역사를 튼튼히 하는 역할을 해왔다. ‘천안을 노래하는 한시’도 엮었고, 누정기문도 번역·정리했다.
조선시대 누정은 휴식공간이자 유흥의 공간이며 학문연마의 도량으로써 다채로운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천안향토 18집에 ‘정랑봉추모비에 관한 고찰’, 천안향토연구 1집에 ‘문헌에 나타난 직산위례성’을 쓰기도 했다.
“계속 전국 누정기문도 번역하고 정리중에 있었는데, 눈(녹내장)이 이래서 더 이상 진척은 없습니다. 몇 개 조사하는 중에 있던 천안향토자료 연구도 중단된 상태에요. 논어수업도 외워서 진행하는 수준이라…, 쉽지 않군요.”
천안 광덕 어디쯤 과연 ‘선비문화’를 체험하고 배울 수 있는 공간이 생길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