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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을 위해 의열의 폭탄을 던진 밀양청년

12월의 독립운동가 최수봉(崔壽鳳·1894.3.3~1921.7.8)선생

등록일 2016년12월06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12월의 독립운동가 최수봉 선생.

독립기념관(관장 윤주경)과 국가보훈처는 독립운동가 최수봉 선생을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고 독립기념관 야외 특별기획전시장에서 선생의 공훈을 기리는 전시회를 개최한다.
여기서는 선생의 사진 등 11점의 사료가 공개될 예정이다.

최수봉 선생은 1894년 3월3일 밀양군 상남면에서 태어났다. 동네에 있던 개량서당을 다니면서 한문과 신지식을 수학했고, 1910년 사립 동화학교(同和學校)에 편입학했다. 동화학교를 다니던 2년 동안 교사들의 가르침을 받으며 강렬한 조국애와 항일의식을 키워나갔다.

1913년 평양으로 가서 숭실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숭실학교 4년 과정 중 3년만 다니고 중퇴했다. 이후 평양과 정주에서 광부와 우편배달부 생활을 하면서 독립운동 소식에 관심을 기울였다. 1918년에는 만주로 건너가 펑티엔(奉天, 선양)과 안뚱(安東, 단둥) 사이를 왕래하며 독립운동에 투신할 동지들을 규합하기 위해 노력했다.

1919년에는 다년간의 외지생활을 접고 귀향했다. 1920년 의열단원 김상윤(金相潤)과 이종암(李鐘岩)을 만나 밀양경찰서 폭탄의거를 결의했다. 12월26일 저녁 삼문리 농업용 창고에서 이종암을 만나 폭탄 2개를 건네받았다. 

최수봉 선생은 12월27일 아침 밀양경찰서에 접근해 폭탄을 투척했다. 첫 번째 폭탄은 불발이었다. 돌연한 사태에 놀란 순사들이 달려들었고, 그들을 향해 다시 폭탄을 투척했다. 폭탄은 큰 폭음을 내며 터졌지만, 순사부장 1명에게 타박상을 입히는데 그치고 말았다. 폭발 이후 황석이(黃石伊)의 집으로 도망쳐 자결을 시도했다. 

그러나 뒤쪽아 온 순사들에게 피체돼 재판에 회부됐다. 최수봉 선생은 재판을 받는 동안 조선의 독립을 위한 노력은 조선 국민으로서 당연한 의무라고 당당히 주장했다. 재판 결과 사형이 언도돼 1921년 7월8일 대구감옥에서 순국했다. 정부는 고인의 활동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정리/이진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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