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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제일고의 전설

김세관(천안·수필가)

등록일 2024년02월20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이제 30년도 넘은 오래 전의 일이 되었다. 지금은 천안제일고등학교로 바뀐 천안농업고등학교 60년사를 집필하게 되었다. 힘든 가운데서도 90여년 전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는 마치 전설처럼 느껴져서 즐거움도 있었다. 어쩌면 지금과는 상황이 너무 달라서, 웃을 수도 없는 기막힌 내용이기도 하다. 

가장 놀란 일은 천안뿐만 아니라 인근 징역까지 유일한 학교였는데, 학생수가 너무 적은 점이었다. 1930년 9월25일에 개교하여 1년6개월만에 첫 졸업생 30명을 배출하였고, 이어서 2회 13명, 3회 10명으로 줄어들었으며, 6회까지 10명 남짓에 불과할 뿐이었다. 당시는 2년제여서 개교 3년차부터 몇해동안 전교생이 20명 남짓이었으니 초미니학교였던 셈이다. 그 적은 인원이 엄청나게 넓은 실습지를 가꾸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짐작도 되지 않는다. 더구나 당시는 전혀 기계화가 이루어지지 않아 오직 인력에 의존하던 시절이 아니었던가. 

1화 졸업생만 더 많은 것이 매우 의아했다. 알고 보니 인근지역까지 중등교육기관이 전혀 없다가 처음 학교가 설립되어서, 첫해만 이미 적체된 교육수요자가 있었다는 의미이다. 이후에는 그해 초등학교 졸업생 위주로 신입생이 입학하게 됨에 따른 현상이었다. 90년 전의 일이라고 하지만, 요즈음 젊은 사람들이 보면 이해할 수 없을 듯하다. 무엇보다 당시는 산업구조가 농업 중심이었는데, 농토가 많아도 농사를 지어서 서울로 유학을 보내기는 엄두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격변기였지만 1948년까지 18년동안 변화무쌍한 학제 개편이 이루어졌다. 2년제로 시작해서 1년제, 3년제, 중·고교가 분리하면서 3년제 고교로 정착되었다. 특이한 현상은 1945년 4월(6년제) 입학, 47년 9월(4년제) 입학, 48년 9월(3년제) 입학한 학생이 모두 1951년 8월31일에 한꺼번에 졸업했다는 점이다. 

1943년에 6년제 중고등학교 과정으로 개편되었다. 교명은 천안공립농업중학교로 바뀌었고, 특기할 내용은 가정과를 설치하고 여학생을 한 학급 모집한 점이었다. 이는 천안지역에서 여성 중등교육의 시작이었고, 이후 천안여자중고등학교로 분리되었으며, 다시 여고가 따로 독립하였다. 국가적인 중고등학교 분리정책에 따라 천안중학교가 떨어져 나가고 오늘날의 3년제 고등학교가 되었다. 
농업학교의 특성상 많은 실습지가 필요함에 따라 현재의 중앙도서관 자리와 구 경찰서 자리, 남쪽으로는 남산초등학교는 물론 천안여중까지, 동쪽으로는 학생회관과 천안중, 중앙고까지가 모두 학교부지였다. 

해방 직후는 극도의 혼란기였다. 일본의 패망과 함께 일본인 교사가 모두 물러가고 보니 남은 사람은 두 명뿐이었다. 해방되기 전에는 교사 중에서 누가 한국인이고 누가 일본인인지 짐작만 했을 뿐이었다고 한다. 모든 과목이 일본어로 교육이 이루어지다가 해방이 되었으니, 이제 한글로 교육을 해야 하는데 교사를 구할 수 없는 참담한 실정이었다. 그저 한글만 터득이 된 사람이면 교사로 모셔야 했을 정도였다. 1학년 교실부터 4학년 교실까지 전교의 모든 교실에서 한글공부부터 하느라, 선생님의 선창에 따라 ‘가갸거겨, 고교구규’를 따라 읽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심각한 문제는 한글만 알면 교사가 될 수 있는 상황이었으나, 급조된 교과서를 읽어주는 수업이 대부분이었다. 다른 과목은 설명이 미흡해도 짐작하고 넘어가곤 했는데, 물리나 화학과목이 문제였다. 어느 학생의 질문을 받은 교사는 다음 날부터 모습을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이에 학생들이 결의한 내용은 웃을 수도 없는 기막한 내용이었다. 
“그나마 선생님이 그만두면 다시 선생님을 구할 수 없으니, 질문하지 말기로 하자.”고 결의했다니 말이다. 

1호 국도와 접해 있었던 교사(校舍)는 6·25 전쟁의 참상을 함께 겪어야 하였다. 당시는 시내 중심에도 변변한 건물이 없었던 시절이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당연히 학교는 휴교가 이루어졌다. 며칠 후에는 피난 정부가 머물렀고, 이후 서울의 각 경찰서가 교실 한 칸씩을 차지했으며, 이어서 국군과 인민군으로 주인이 바뀌었다. 

다시 얼마 후에는 앞의 역순이었다. 현재 맨 앞의 본관은 건립되기 전이었고, 지금은 실험실습관이 있던 자리에 오래된 2층 벽돌 건물이 있었다. 1990년대 초반에 철거되었는데, 그전에 마루로 된 바닥을 수리할 때 대량의 M1 실탄이 수거되는 것을 목격하였다. 놀라운 것은 당시 40년이 넘었음에도 녹이 슬지 않아서 바로 사용이 가능해 보였다. 국군이 후퇴하는 과정에서 병사가 그 무거운 실탄을 짊어지고, 온종일 걸어야 했던 고통을 짐작하게 하였다. 

지금은 선호도가 낮아졌지만, 70년대 후반까지는 2:1 정도의 경쟁률을 기록했고, 당시에는 천안의 주요 기관장이 모두 천농 출신이어서 역사가 깊은 학교의 학생으로서 자부심도 있었다. 
천농의 자랑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교목 낙우송의 우람한 모습, 운동장 위에 도열해 있던 희귀수종 민둥아카시아, 풍성했던 ‘개교 반세기 기념축제’와 국화전시회, 교육부 주최 행사인 ‘한국영농학생전진대회’를 두 번이나 주관했던 일, 전국대회에 출전한 축구부의 선전 등이 있다. 

졸업생은 3년을 다니는 학교이지만, 15년을 근무했다면 모교 이상의 큰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지금도 중앙도서관에 갈 일이 있으면 한참동안 교정을 내려다보기도 하고, 여유가 있으면 운동장 위 스탠드와 실습농장을 한 바퀴 돌아보곤 한다. 시설이 현대화되면서 달리진 풍경이 많지만, 천안 도심의 큰 공원과도 같았던 옛 모습을 떠올리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편집부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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