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거산 위례성에 있는 용샘에서 목제잉어 2점이 출토됐다. 용샘 내부에서 발견된 잉어모양의 목제품은 잉어모양으로 조각한 후 눈과 입, 비늘과 꼬리 등을 먹으로 세밀하게 그려놓았다. 두점 중 하나는 비늘까지 형태가 고스란히 살아있으며, 다른 한 점은 먹이 거의 지워져 있다.
위례성에서 ‘목제잉어가’ 발견됐다는 건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
일단 목제잉어가 자주 나오는 사례는 아니라고 한다. 조사를 담당했던 충청남도역사문화원(원장 장호수·공주 소재) 측은 “자료를 찾아보고 있지만 목제잉어가 언급된 곳을 아직 찾지 못했다”고 전했다.
잉어는 ‘용’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장호수 조사단장은 “제례적 측면에서 잉어는 하늘과 이어주는 매개체의 역할을 의미한다”고 했다.
이호경 책임연구원은 “성거산 용샘이 용출되는 물이 아닌 담수용 저수시설로, 바닥에 목제잉어가 발견됐다는 건 그만큼 산성에 물이 중요하다는 의미고, 이같은 목제잉어를 둠으로써 기원 성격의 제례가 아닐까 생각한다”고 전했다.
잉어는 물이 있어야 살아가니, 목제잉어가 우물 속에 있는 한 우물물은 마르지 않을 거라는데 착안한 기원적 성격인 것이다.
용샘은 용출 아닌 ‘저장형’
이번 성거산 위례성 내 용샘 발굴조사는 용샘의 구조와 현황, 축조시기를 고증하고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정비복원을 진행할 목적으로 실시됐다.
충청남도역사문화원에 따르면, 용샘은 이미 수차례 훼손이 진행돼 그 형태가 온전히 남아있지 않다. 이런 이유로 현재 남아있는 부분들로 유추해볼 때 직경 약 150㎝ 내외, 깊이 약 370㎝의 평면원형의 우물로 보인다.
우물의 바닥면은 풍화암반을 굴착해 중앙부를 ‘U’자 형태로 오목하게 파고, 주변은 수평으로 깎았다. 그 위에 돌과 점토를 쌓고 우물의 형태를 구성했다.
우물의 벽석 내부로 20㎝☓18㎝ 굵기의 사각형으로 깎은 목재들이 확인된다. 목제 외곽은 점토와 석재로 보강했고, 목재 내곽은 석재를 이용해 우물의 형태로 조성한 것으로 확인됐다.
시 문화관광과 김은정 학예사는 “용샘에 대한 정비복원을 어떤 형태로 갈 것인지는 조만간 전문가 의견을 들어 결정할 것”이라고 전했다.
한편 충청남도역사문화원측은 위례성의 축조시기를 통일신라시대로 보고 있다. 위례성은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다시 쌓아 사용한 성곽유적으로, 성내에서는 백제시대 토기편들이 수습되고 있어 백제시대에도 활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용샘 내 잉어 모양의 목제가 노출된 모습.
성거산 위례성은 1984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60호로 지정됐다가 1998년 충청남도 기념물 제148호로 변경됐다.
그간 서울대인문학연구소에서 3차례, 그리고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에서 2차례 발굴조사를 진행해 위례성 성곽의 현황과 서문지, 성내건물지 등을 확인했다. 백제초도를 입증할 단서를 찾는데 초점을 두고 있지만, 백사장에서 바늘찾기 같은 것.
한 관계자는 백제초도설은 그 가능성이 점점 희박해져가고 있으며, 조선시대 실학자들의 오류로도 보고있다며 “백제초도설에만 매몰되지 말고, 보다 시야를 넓혀 역사고증의 연구범위를 확대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백제초도를 밝히는 데만 관심을 두다 보니 체계적으로 천안역사를 고증해나가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위례산 용샘에 관한 전설
옛날 백제가 공주에 수도를 정하고 있을 무렵, 왕은 남침해 오는 고구려의 군사를 막기 위해 이곳 위례산까지 와서 전쟁을 독려했다. 용왕의 아들이었던 왕은 온갖 재주를 부리는 인물이었다. 왕이 위례산에 올 때는 용으로 변해 공주에서 위례산 용샘까지 땅속 물줄기를 타고 왔다. 고구려군은 영토를 확장하고자 틈만 있으면 백제를 공격했으나, 왕이 여러가지 조화를 부려 전쟁을 지휘했던 까닭에 번번이 패했다.
그러던 어느날 왕의 처남이 왕비에게 왕이 간 곳을 물으니, 왕비는 왕이 사람이 아니라 용이라며 저간의 사정을 말해줬다. 가뜩이나 왕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처남은 왕을 죽이기로 작정했다. 그래서 용이 좋아한다는 제비를 잡아 낚싯밥으로 만들어가지고 왕이 용으로 되었다가 사람이 되어 나오는 강가로 갔다. 처남은 낚시를 강물에 던져놓고 기다렸다.
하루종일 산성에서 전쟁을 지휘한 왕은 피로와 시장기를 느꼈다. 그때 마침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제비가 보여 그것을 덥석 물었고, 처남은 낚싯대를 힘껏 당겼다. 용은 공주 우성면 동대리 마을에 떨어져 죽었으며, 왕이 죽은 이튿날 백제군은 위례산 전투에서 패하고 말았다.
천안에는 이같은 용샘의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