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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 ‘공세리 성당’

내포 지방 전교의 전진기지…박씨 삼형제와 순교자들의 안식처

등록일 2014년11월24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프란치시코 교황 방문 이후 충남도 무엇을 해야하나? - '아산시 공세리성당'
지난 8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다녀갔다. 한동안 ‘교황 신드롬’이 이어질 만큼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사회에 전한 메시지는 강렬했고 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렸다. 특히 교황은 이번 방한 일정 중, 당진시 솔뫼성지와 서산시 해미읍성 등 충남 내포지역의 주요 천주교 성지를 방문하면서 천주교 신자들은 물론 타 종교인 또는 비종교인들의 관심이 집중되기도 했다. 이번 연합기획취재는 프란치스코 교황 방문을 계기로 충남지역에 미친 영향과 천주교를 중심으로 한 내포지역의 역사·문화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순례자의 길 조성 등 국제 관광지 조성의 가능성을 타진해 보고자 기획했다.<당진시대·내포시대·태안신문·충남시사신문·공주신문 연합기획취재팀>

2005년 한국관광공사에서 선정한 가장 아름다운 성당으로 뽑힌 공세리 성당은 1922년에 지어진 고풍스런 성당 건물이 주변의 오래된 나무들과 어우러져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미사를 마친 후 말끔하게 정리된 공세리성당 제대가 1922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공세리 성당은 천주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90여 편의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한 번 쯤은 봤을 만한 친숙한 모습의 성당이다.

2005년 한국관광공사에서 선정한 가장 아름다운 성당으로 뽑힌 공세리 성당은 1922년에 지어진 고풍스런 성당 건물이 주변의 오래된 나무들과 어우러져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성당 내부는 처음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지금도 여전히 옛 신앙인들의 숨결을 느끼게 한다.

예부터 공세리는 포구를 가진 교통의 요충지였다. 충청도 일대에서 거둔 많은 세곡들을 보관하는 ‘공세창고’가 있었다. 공세리라는 지명은 여기에서 유래한다. 그 공세창고가 있던 자리에 성당이 있다.

1894년 간양골 성당의 파츠키에 초대 신부가 동학농민전쟁을 겪으면서 투병을 하게 되자, 이듬해 드비즈 신부가 부임한 후, 현재 공세리로 그 터를 옮겼다. 드비즈 신부가 직접 성당 설계를 하고, 중국인 기술자들을 동원해 이국적이고 웅장한 성당과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중인 사제관을 지었다.

성당 구역 내에 납골식 순교자 현양탑과 묘지가 세워졌다. 묘지에는 1866년 병인박해때 인근에서 체포된 32명의 순교자 유해가 봉안돼 있다. 공세리 성당 구내에는 옛 사제관을 개조한 박물관이 있어 지역의 역사와 내포천주교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피정의 집은 성당, 단체, 개인 등이 원하는 일정을 진행하도록 순례자들을 위한 각종 시설이 마련돼 있다.

40개 고을 공세창고 헐고 공세리 성당 건축

1898년에 완공된 옛 공세리성당 별채.

공세리성당으로 향하는 마을 주민들의 옛 모습.

바다가 육지로 깊숙이 들어온 아산만에 인접한 충남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성당은 일찍이 조선조 때 아산·서산·한산을 비롯해 멀리 청주·문의·옥천·회인 등 40개 고을의 조세(租稅)를 쌓아 두던 공세(貢稅) 창고가 있던 곳이다. 이 창고 건물은 1523년(중종 18년)에 개설됐다가 고종 때 폐지됨으로써 80칸짜리 건물이 헐리고 그 자리에 1897년 구(舊) 성당 및 사제관 건물이 들어섰다.

공세리 본당의 오늘이 있기까지 초대 주임을 지냈던 드비즈 신부의 열정적인 사목 활동이 그 바탕을 이루었다. 드비즈 신부는 2대 기낭 신부가 1년 만에 전임하면서 초대에 이어 다시 3대 주임으로 부임해 1930년까지 34년간 공세리 본당의 기반을 굳건히 하고 발전의 터를 닦았다.

크고 화려함으로 건축 당시 아산 지방의 명물로 멀리서까지 많은 구경꾼을 불러왔던 현재의 성당 건물은 그 자신이 직접 설계하고, 중국인 건축 기술자들을 불러 지휘 감독하면서 지은 1922년도의 성당이다.

길을 올라가면 한 편으로는 성당이 자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유박해(1801년)부터 병인박해(1866년)까지 아산 공세리 지역 출신 순교자 32위를 모신 납골식 순교자 현양탑이 있다. 그리고 그 앞으로 순교자들의 잠자리를 말없이 지켜보는 성모상이 건립돼 있다.

순교자 현양탑이 세워진 곳에는 원래 1867년 정묘년에 순교한 박의서(사바스), 박원서(마르코) 그리고 박익서(본명 미상) 3형제가 나란히 잠들어 있는 묘소가 있던 곳이다. 그리 멀지 않은 옛날 선조들 중에는 전국 곳곳에 이름도 채 남기지 못한 채 오직 천주를 모신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목숨을 잃은 무명의 순교자들이 많다. 이곳에 모셔진 박씨 3형제는 이름과 몇 가지 행적만이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어떻게 살다가 죽어 갔는지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없다. 

미뤄 짐작컨대 다른 많은 순교자들과 마찬가지로 죽음 앞에서도 신앙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병인치명사적’ 제11권은 “병인풍파를 당해 3형제가 함께 잡혀 수원으로 올라가며 원서가 말하되 ‘내 평생 천주 공경을 실답게 하지 못하였더니 오늘 주께서 나를 부르셨노라’며 즐거워 (중략) ‘동생 들어 보소. 우리 3형제 올라가 위주 치명하자’ 하고 조금도 변함없이 3형제 수원으로 올라가니…”라고 이들의 최후의 순간을 기록하고 있다.

성당과 옛 사제관 충청남도 기념물 제144호 지정

공세리성당 성체조배실.

공세리성당 피정의 집.

공세리 성당은 1995년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본당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고, 1998년 7월28일 성당과 옛 사제관이 충청남도 기념물 제144호로 지정됐다. 2000년 성당과 옛 사제관의 원형 복원 공사와 사제관, 수녀원, 예수마음 피정의 집, 성체조배실, 주변 정비사업을 시작해 2002년 10월13일 축복식을 가졌다.

2007년 8월에는 3형제 순교자의 묘가 있던 자리에 순교자 현양탑을 세워 아산 공세리 지역 출신 순교자 28위의 유해와 묘석을 봉안하고 그 위에 도자기 테라코타 부조작품 ‘28위 순교자’를 설치했다. 그 후 추가로 발굴된 4위 순교자의 유해 또한 이곳에 모셔졌다. 2008년 9월에는 옛 사제관을 개보수해 박물관으로 개관했다.

성당 옆으로는 한적한 오솔길도 마련돼 있는데 이 길에는 예수의 수난을 묵상할 수 있는 14처가 마련돼 있다. 십자가를 지고 피땀을 흘린 예수와 같이 선조들도 자신의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시대가 가져온 험한 박해의 시기를 겪었던 것이다. 건축 당시의 모습을 잘 보존해 온 성당 옆에는 오래 된 고목이 한 그루 있다. 그 연륜을 알 수 없는 고목은 공세리 본당의 긴 역사를 그저 무심한 듯 말없이 증언해주고 있다.

내포 지방 신앙의 못자리

공세리성당 십자가의 길.

공세리 천주교회는 1895년 파리 외방 선교회 드비즈(에밀리오) 신부가 당시 동네 한 가운데 신자집을 임시로 사용해 복음을 전파하며 시작됐다. 그 후 1897년 창고 건물(현 사제관)을 헐고 구 성당과 구 사제관을 임시로 지었다.

지금의 성당이 위치한 8000여 평의 부지는 예로부터 공세 곡창지(貢稅 穀倉地)로 유명한 곳이다. 조선조 성종 9년(1476년) 세곡 해운창을 설치 운영하다가 중종 18년(1524년) 80칸의 창고를 지어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일원으로부터 거둬들인 세곡을 집결한 후 조운선으로 서해 물결을 따라 한양으로 운반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이같이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에서 세금을 거두어 임시 보관했던 자리가 400년이 지난 1890년에 들어서면서 내포 지방에 상륙한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가톨릭 신앙 전교의 전진 기지로 바뀌었다.

초대 본당 신부인 드비즈 신부는 1895년 5월6일부터 1931년 7월5일까지 본당 사목을 했다. 현재의 성당을 자신이 직접 설계하고 지휘 감독해 1922년 10월8일 성당을 완공했다. 드비즈 신부는 지역 교육사업과 의료사업 등 많은 노력을 했고, 자신이 직접 조제한 한방의술을 활용한 한약 조제로 지금은 고인이 된 유명한 이명래 요한 씨에게 고약의 비법을 전수시키기도 했다.

또한 공세리 본당은 내포 지방 신앙의 못자리다. 1897년 6월 공주 본당 분할, 1901년 안성 본당 분할, 1948년 온양온천동 본당 분할, 1976년 둔포 본당을 분할시켰다.

본당 구내에 삼위의 순교자를 모신 묘가 자리하고 있다. 1863년 조선 흥선대원군이 정권을 잡고, 1866년 병인박해 때 밀두리, 걸매포, 해암리 신자 28명이 수원, 서울, 공주 등으로 끌려가서 고문, 옥사, 교수 등으로 순교했다. 그런데 박의서, 박익서, 박원서 삼형제의 시신을 신자 한 명이 찾아 본당에서 서남쪽으로 5km 떨어진 해암리 맹고개에 모셨다가, 그분이 돌아가실 때 남긴 유언에 따라 1988년 9월20일 본당 구내로 모셔왔다.

1995년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본당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고, 1998년 성당과 구 사제관이 충청남도 기념물 제144호로 지정됐다. 2002년 10월 새 사제관, 수녀원, 예수마음 피정의 집, 성체조배실을 완공해 축복식을 갖고 주변 정비사업을 마무리했다.

문화재 및 다수의 국가보호수를 보유하고 있는 성당

공세리 성당에는 350년 이상된 국가지정 아름다운 보호수가 5그루나 있다.

공세리 성당은 1890년에 설립돼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유서깊은 성당으로 충청남도 지정 문화재 144호면서, 2005년도에 한국관광공사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성장으로 선정한 성당이다.

350년이 넘는 국가 보호수도 5그루나 있고, 그에 버금가는 오래된 거목들이 성당의 아룸다움을 더해 주고 있으며, 보는 지점이나 계절마다 다른 독특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공세리 성당이 위치하고 있는 아산만과 삽교천은 교회 박회 시대에는 해상과 육로를 연결하는 내포지방의 입구였으며, 현재 32명의 순교자를 모시고 있다.
특히 박해시대때 내포지방은 천주교 신앙의 요충지로써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이 곳에서 잡혀 각지로 끌려가 순교를 당하는데 바로 이곳은 내포지방이 시작되는 입구로써 해상과 육로를 연결하는 중요한 포구였다.

성당이 위치한 1만여 평의 부지는 예로부터 충청도 일대에서 거둬들인 세곡을 저장하던 공세창고가 있던 곳이다. 조선조 성종 9년(1478년) 이 곳에 세곡 해운창이 설치되고 운영되다가, 중종18년(1523년) 80칸의 창고가 지어지고, 영조 38년(1762년) 폐창이 될 때까지 300년 정도 운영됐다.

공세리 성당은 영화와 드라마 촬영 장소로 각광을 받고 있는 장소다. 현재까지 90여 편이 넘는 영화, 드라마가 촬영됐다. 뿐만 아니라 현재도 계속해서 영화와 드라마 촬영을 위한 요청이 끊이지 않고 있다.

대표작은 ‘태극기 휘날리며’ ‘수녀 아가다’ ‘사랑과 야망’ ‘에덴의 동쪽’ ‘미남이시네요’ ‘아내가 돌아왔다’ ‘글로리아’ 등 다수가 있다.

처음 고약을 개발, 보급한 곳

한 때 상처와 종기에 고약만한 것이 없었다. 그 고약을 맨 처음 만들어 보급한 곳이 바로 공세리 성당이다.

1895년 공세리성당에 부임한 에밀 드비즈 신부가 프랑스에서 배우고 익힌 방법으로 원료를 구입해 고약을 만들어 종기로 고생하는 수많은 사람에게 무료로 나눠줬다. 그 비법을 당시 신부를 도와 일하던 이명래(요한)에게 전수해 이명래 고약이라는 이름으로 전국에 보급하며 널리 알려지게 됐다.

박씨 3형제와 순교자에 대한 기록

천주교 박해당시 모습을 재연하는 것으로 보인다.

신유~병인박해 순교자 공세리성당 32위 헌양비.

순교한 박씨 3형제에 대한 기록이 비문으로 남아있다.

▶박의서(사바스)
후덕한 인품과 굳은 신앙심으로 죽음이 두려워 신앙심이 흔들리거나 배교하려는 마음 없이 깨끗하게 주를 증거하고 목숨을 바쳐 순교했다. 박의서 3형제가 수원 걸매리에 살았으며, 그 후손들이 전라북도 익산군 함열면 용왕동에서 살고 있는 밀양 박씨 집안임을 알 수 있다. 이 후손들은 박해를 피해 일부는 전라북도 익산군 함열면 용왕동으로, 일부는 충남 강경으로, 또 일부는 평택으로 흩어져 살고 있다. 이 후손들 중에서 박상래, 박성팔, 박노헌, 박중신 신부 등 네 명의 사제가 배출됐다.

▶박원서(마르코)
한국교회사 연구소에서 정리 중인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제3부]에 의하면 그는 본디 태중 교우로되 마음이 우람하기로 수계를 잘못하고, 노름도 약간하고, 서털구털 지내므로 그 형님이 항상 걱정하며 살다가 병인년에 3형제가 함께 수원으로 잡혀갈 때 말하기를, “내 평생에 천주를 공경함을 실답게 못하였더니, 오늘 주께서 나를 부르셨다”고 즐거워하며, 장차(將差)더러 “나를 이번에 올려 가거든 갑작스럽게 하지 말고 바로 죽여주면 우리 주모께로 가서 살겠다”며 오히려 그 형님과 아우를 권면하고, 기쁜 마음으로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박익서(세례명 미상, 박상래 신부의 증조부)
(비문) 천성이 곱고 순결하여 오로지 한 마음으로 천주를 공경하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이들 삼형제와 이 마리아가 함께 수원으로 잡혀가 1867년 3월8일 순교했다. 시체는 그 당질 웅진씨 바오로와 양성우씨가 거둬 아산시 인주면 맹고개 선영에 안장했다가 1988년 9월20일 맹고개 묘지에서 공세리 본당으로 이장했다.
 
▶밀양 박씨 집안의 순교자 7명
이 마리아(박원서의 부인), 박인서(박의서의 사촌동생), 박제환 기천 베드로, 박홍갑(박의서의 아들), 조 모니카(박덕여의 부인), 박화진 알렉산데르(박덕여의 아들), 이씨 부인(박의서의 종제수)
 
▶박씨 외의 걸매리 지방 순교자들
-김중백, 김지득, 이학습, 김장복(박덕여의 생질), 김씨(김장복의 아내), 오인악, 장원심과 그의 아들 장팔보, 김흥서 토마(지금의 수원교구 남양성당에 성지화), 김 필립보(비리버)와 그의 아내 박 마리아 남양에서 순교), 최사도 요한
[출처, 공세리본당 100년사, 공세리성당 홈페이지, 천주교 대전교구, 아산시청 문화관광과]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을 위로하며 순례자들이 밝힌 촛불.

☞메모
주소: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성당길 10
전화번호: (041)533-8181
팩스번호: (041)533-2087
홈페이지: http://www.gongseri.or.kr
문화정보 충청남도 기념물 제144호(성당과 구 사제관)

정리/이정구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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