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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사람 문장가, 김이양(金履陽)

<역사칼럼/ 김성열 천안시 역사문화연구실장>

등록일 2013년05월20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연천(淵泉) 김이양(金履陽)은 天安 廣德사람으로 安東이 本貫으로 大文章家로 알려져 온다.

김이양은 1755년생으로 아버지는 漢城府判尹을 지낸 金憲行이다. 字는 命汝 이며 初名은 履永이었는데 睿宗과 이름이 비슷하여 避諱하기 위하여 이양이라 개명하였다. 1783년(정조7) 生員試에서 壯元하였고 1795년(정조12) 庭試文科에 乙科로 급제하였으며 1811년에는 吏曹參判, 1812년에는 咸鏡監司로 제수되었다. 함경감사로 있을 때는 그 고장주님들의 민생고를 해결하는데 노력하엿고 또 변경지방 군사제도가 불합리함을 지적하는 장계를 올려 시정하도록 하였고 동시에 魚籃船稅와 屯田稅 및 匹馬의 헌납을 감면해 주도록 주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함경도의 脹還穀 확보를 위해서 嶺南浦港倉의 곡식 3만석을 移給해 주도록 주청하여 2만 3천석을 얻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다.

1815년에 漢城判尹이 되고 같은 해 禮曹判書와 吏制의 개혁과 화폐제도의 개선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1819년 弘文館提學이 되고 이듬해 義禁府判事를 거쳐 左參贊에 올랐다. 이렇게 要職을 두루 거친 김이양은 1826년 예조판서를 끝으로 하여 임금(純祖)께 휴가를 청하였고 이에 허락을 받은 김이양은 이후 17년간 강호명소를 찾아 소요하였다. 1843년 司馬回詩로 입시(入侍)하여 헌종왕의 하사품을 받았으며 1844년에는 90세가 되어 임금으로부터 안석과 지팡이 机杖을 하사받았고 奉朝賀로 있다가 1845년에 세상을 떠났다.

죽은 후 中樞府領事에 追贈되었다. 김이양의 부인은 李明祥의 딸인 完山李氏이며 아들을 두지 못하여 履枯의 아들인 漢淳을 養子로 들였다. 한순은 大根과 賢根 두 아들을 두었는데 현근은 순조의 딸인 明溫公主와 결혼하여 東寧尉에 봉해졌다. 金履陽 文集이 전해온다.

김이양은 1826년부터 관직에 얽매이지 않고 강호를 유람하였고 이 과정에서 成川 詩妓 운초 김부용을 만난 것이라 생각한다. 운초는 비록 김이양의 正妻는 아니었고 나이 차이 또한 많았지만 상당히 만족스럽게 살았던 것 같다. 그것은 김이양이 당시 위세를 떨치던 안동김문의 사람이었지만 관직에 있는 동안 상당히 선처를 베풀었던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강호 자연을 좋아하고 풍류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운초로서 좋아하고 존경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운초는 성천 출신이었기 때문에 성천지역은 물론이거니와 관서지방의 중심지인 평양과 삼등과 강동 그리고 황해도 해주지방에서도 활동하였던 모습을 시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김이양 또한 명승고적이 많기로 이름난 이 지역을 유람하였고 이때 강동 땅에서 운초와 인연을 맺은 것으로 보인다.
 

운초에 주노라 (贈雲楚)

왕년에 오강 땅에서 인연 맺었고 珪世吳中始定緣

금년에 또 해서 물가에 함께 있노라 今年又在海西邊

나와의 만남 늦었다고 겸손하게 말했다니 我聞嗟晩逢謙益

번소도 끝끝내 백난천을 못 떠났소 樊素終難謝樂天

술 따르는 얌전함이 세속 상대보다 어질고 酌酒猶賢俗呂對

시에 대한 소견은 당나라 때 못지 않네 論詩不下開元前

고용한 밤 책상 기대 읊은 소리 맑고 밝아 閑宵隱几流淸聽

시경 빈풍 칠월편을 낭랑히 외고 있네 朗誦豳風七月篇
 

김이양과의 만남은 당연히 운초의 생애에 중요한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기녀생활에 종지부를 찍은 것도 그렇지만 한 남자와의 사랑은 운초의 시 세계에도 큰 변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기녀시절의 운초의 시는 여러 가지 감회가 주류를 이루었다면 김이양을 만난 후에 지은 시 그리고 화답한 시들은 50여년이란 나이 차이가 무색할 정도로 서로의 절절한 사랑의 마음을 담고 있다. 또 운초에 대한 김이양의 깊은 애정을 보여주고 있는 시로는
 

<희롱삼아 운초에 주다> <戱贈雲楚>

문 앞에 연리수가 있는데 門前連理樹

까치 한쌍 나무위에 둥지를 틀어 다정하네 樹上雙鵲巢

지게 창문 마주놓고 그윽히 비추이고 戶牖相隱映

가지와 줄기에 은밀하게 사귀네 枝幹密縡交
 

김이양대감 묘는 천안 광덕사 뒷산에 부인 완산이씨와 합장되어 전해온다. 김대감 연인 초당마마 운초 김부용은 평소 유언에 따라 김이양 대감 묘가 가까운 등산로에 묻혀 전해 온다. 1974년에 소설가 정비석선생이 발굴한 김부용 묘에는 천안향토문화연구회(창립 김성열)에서 묘비석과 안내 비목을 세워 놓았고 천안예총, 문협에서 시비를 세우고 매년 추모 다례행사를 다림헌(회장 전재분) 협찬으로 거행하고 있다.

천안향토문화연구회에서는 김이양 대감묘 안내 비목을 세웠다. 소설가 정비석 선생은 광덕 천안공원묘원 G10에 잠들어 계신다.

 

 

 

 

 

 

 

 

 

 

 

 

 

 

편집부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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