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너 닫기
뉴스등록
맨위로

천안시장후보 인물탐구3 - 류병학-천안행정 책임졌던 노하우로 발전 가속화

등록일 2002년05월25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아직도 마음은 어렸을 적 개울가에서 뛰어놀고 있는 나의 모습이 상상되는데 어느덧 반세기가 흘렀다. 누구나 다 어려웠던 시절, 시대의 격동기에 어린 시절을 보내야만 했던 우리 세대. 하지만 그 어려움을 이겨냈기에 오늘의 우리나라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가난속에 배움의 열기 높아 한창 일제강점기의 문화말살정책이 민족혼을 뒤흔들던 1936년 6월3일. 류병학 후보(66·쌍용동)는 흑성산 기슭에 자리잡은 목천 교촌리의 작은 마을에서 우렁찬 첫울음을 터뜨렸다. 시대상황이 그러하듯 ‘혹독한 고생을 달고’ 태어난 그에게 유년시절은 결코 평탄할 수 없었다. 항상 세끼 걱정을 해야 했던 시절. 양반임을 고집하며 완고했던 아버지와 순박했던 어머니, 그리고 항상 주린 배를 움켜잡고 다니던 8남매의 모습은 당시 시대상을 대변하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학비를 조달하고 생활고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허용된 벌목에 매달려야 했다. 어린 나이에도 5일장이 서는 날이면 어김없이 산을 넘어 장터까지 희망에 부푼 마음으로 향했다. 천안중학교를 다닐 때는 흑성산을 넘어 4시간을 걸어가야 했다. 그에게 있어서 배움이라는 것은 요즘 젊은이들이 즐겨하는 스타크래프트와 버금가는 즐거움이었다. 장학금이라는 용어가 낯설었던 시절, 공납금과 교과서 대금을 납부하지 못해 수없이 불려다니던 그에게 담임선생은 어느날 공납금 미납자 명단에서 슬며시 제외해 주기도 했다. 거구의 체격에 솥뚜껑만한 손바닥을 가진 큰형(류병숙·1923년생)은 젊은 나이에 아버지를 대신해 집안의 가장이 되었다. 그러나 힘들더라도 동생들을 교육시키려 했던 큰형은 민족상잔의 비극인, 6·25의 전란속에 총상의 후유증으로 운명을 달리했다. 류 후보는 어려운 경제여건 속에 들어간 홍익대 법학부 2년째 문턱을 스스로 걸어나와야 했다. 큰형을 의지해 왔던 그에게 더 이상의 공부는 무리였다. “내가 민족주의자인 백범 김구 선생님을 좋아하게 됐던 계기이기도 했어요. 민족간 총부리를 겨누던 시대상황, 게다가 그 희생자가 내 큰형이 됐다는 건 큰 충격이었죠.” 수저2벌, 보리한섬, 사글세방, 그리고 연탄 2장 62년, 천안에서 공직생활의 첫걸음을 떼며 그는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당시 직산면에 살던 아내 이춘자(60)씨와 중매로 만난 그는 짧은 연예생활과 함께 결혼에 골인. 그러나 가진 것 없는 그에게 신혼살림은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듯 수저 2벌, 보리 한 섬, 사글세방 그리고 연탄 2장이 전부였다. 게다가 갓 시작한 신혼부부에게 처남과 질녀가 번갈아 들어오며 허니문의 낭만은 꿈속에서나 가능한 일이 돼버렸다. 류 후보는 자신에 대해 “매력적이지도, 가정적이지도 않은 사람”이라고 진단한다. 결혼과 함께 찾아온 직장은 가장으로의 책임감과 함께 그를 자연스럽게 일벌레로 만들었다. 어렵게 살아왔던 그는 가족에게 생활고를 짐지워주고 싶지 않았던 부담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가정보다 일을 먼저’ 찾았던 그에게 월급봉투는 종이짝처럼 얇았고, 한때 안사람을 바깥사람으로 만들기도 했다. 가정형편에 대한 일화가 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시절, 그가 늦게 들어오는 날은 아이들이 자지 않고 기다리던 때가 있었다. 어느날 기특한 생각에 물었더니 그가 술을 마시고 늦게 들어왔는데 통닭을 사가지고 왔다 한다. 그 이후부터 아이들은 그를 기다린 게 아니라 통닭을 기다리게 됐다고. 그에게 ‘가장으로서 참 많이 부족하구나’ 하는 생각을 크게 가졌던 사건이었다. 옛날 일을 회상하며 가끔씩 농담삼아 던지는 말에 아내는 “당신하고는 다신 살지 않겠다”며 손을 절레절레 흔들지만, 그래도 웃는 얼굴이다. “꼼꼼한 나에게 맞춰 언제나 참기만 했던 사람, 남편 몫까지 대신해 가정을 지켜준 사람. 그동안은 최진희의 ‘사랑의 미로’같은 노래로 내 마음을 전했지만 이제는 「사랑하오! 나에게는 당신밖에 없구려」 하는 한마디 말을 해주고 싶습니다.” 그는 자식농사로 두 아들을 거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가슴에 묻어둔 딸아이 하나가 더 있으니 ‘2남1녀’가 된다. 부모와 자식간에 갈등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와 아내는 대부분의 결정을 자신들에게 맡겼다. 큰 애가 대학 졸업 후 유학길을 떠난다고 했을 때도, 배우자를 결정할 때도, 작은 아이가 대기업을 그만두고 작은 회사로 옮긴다고 했을 때도 아이들 결정을 존중해 주었다. “글쎄요. 아버지는 권위적인 면이 전혀 없진 않지만 ‘민주적’인 아버지였다고 인정해요.” 작은 아들, 유종현씨가 보는 아버지는 항상 주어진 환경에 안주하지 말고 도전을 통해 자기발전을 이루라는 말을 아끼지 않는다. 그가 제일 아끼는 소장품은 한폭의 산수화다. 심향의 작품인 이 도화는 산골의 전원풍경에 반해서 그가 10년 전 큰 돈을 들이지 않고 직접 구입한 것이다. 업무스타일은 ‘시스템론’ 공직에 있으면서 그가 제일 중요시했던 건 ‘시스템’이었다. 무조건적으로 시민들에게 요구하는 요구행정은 한계가 있음을 절감, 시민들이 따라올 수 있는 여건 조성이 먼저 실행된 후에야 시민참여가 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는 이 시스템론을 은행의 대기표 발행기 도입을 들어 설명했다. ‘줄좀 잘 서주세요’, ‘새치기 하지 마세요’ 하며 아무리 떠들어도 지켜지지 않던 것이 대기표가 생기자 순식간에 사라졌다. 고객들은 소파에 앉아서 자기 순번을 기다리며 잡지 등을 넘겨보다가 업무를 볼 수 있게 됐다. 하나의 시스템이 질서를 잡은 것이다. 그는 당진군수를 거쳐 93년부터 14개월동안 천안군수시절을 보냈다. 84년 천안시 총무국장과 문화공보실장을 역임하기도 한 그는 천안지역에 많은 업적을 갖고 있기도 하다. 천안군수 재임당시 천안 최초로 세계 유수의 외국업체를 유치했으며, 나주배라는 이름으로 팔려나가던 성환배의 이름을 되찾았다. 또 입장 거봉포도축제를 처음으로 개최, 거봉포도 마케팅의 기폭제를 만들기도 했다. 류병학 후보는 천안시 봉사의 일임을 맡겨 준다면 ‘시스템적 마인드’로 1백만 시대로 발돋움하는 천안에 안정적인 체계를 구축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류병학 개인신상기록 ○생년월일 : 1936년 6월3일 ○출 생 지 : 천안시 목천면 교촌리 ○본 관 : 문화 ○혈 액 형 : O형 ○신 장 : 175㎝ ○체 중 : 76㎏ ○군 복 무 : 육군만기제대(병장) ○가족관계 : 처, 2남 ○재 산 : 부동산 1억9백만원, 동산 9백20만원 ○납세실적 : 종합토지세 2만9천8백70원 ○미 납 세 : 없음 ○학 력 : 목천초, 천안중, 천안농고, 홍익대 법학부 2년 중퇴 ○주요경력 : 천안군수, 당진군수 ○감명받은 책 : <버리고 떠나기-법정스님> ○존경하는 인물 : 김 구, 케네디 ○좋아하는 스포츠 : 등산 ○주 량 : 소주 1병 ○담 배 : 안함 ○좋아하는 음식 : 된장찌개 ○좋아하는 연예인 : 최진희, 안치환 ○종 교 : 불교 ○별 명 : 일벌레 ○저 서 : 없음 ○좌 우 명 : 최선을 다하자 ○어릴적 꿈 : 사업가 ○애 창 곡 : 최진희의 「사랑의 미로」 ○본인 자동차 차종 : 95년식 소나타Ⅱ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소장품 : 심 향의 산수화 작품 ○취 미 : 독서
김학수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관련뉴스 - 관련뉴스가 없습니다.
유료기사 결제하기 무통장 입금자명 입금예정일자
입금할 금액은 입니다. (입금하실 입금자명 + 입금예정일자를 입력하세요)

가장 많이 본 뉴스

종합 뉴스 라이프 우리동네 향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