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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짜스님 지월의 마을사랑

청당동 거재마을, 마을 대소사에 술·고기 걸리는 것 없어

등록일 2002년03월16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저 영감탱이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내가 언제 (마을)회관 물건을 아무나 빌려줬다는 거야. 알려면 똑바로 알아야지.”

12일(화) 오후 1시경. 햇빛이 따사로이 내리쬐는 청당동 거재마을은 잠시 지월스님(46)의 불평어린 언성으로 시끄러워졌다.

본지 기자와 상견례를 나눈 후에도 돌아서서 한참을 쏘아댄 후에야 화를 식히는 지월스님. 그의 이런 모습은 마을 사람들에게는 흔한 경관이다.

따발총처럼 쏘아대는 반말투의 말은 ‘그이니까’ 통한다. 그가 사는 곳은 마을 안의 천문암. 걷는 발걸음이 어찌나 빠른지 뒷사람은 반은 달려야 할 걸음이었다.

천문암은 일반 집이었는데 안내된 작은 방은 꽤나 고즈넉했으며 가득 놓여진 자료들과 벽에 빼곡이 붙여진 메모지는 그가 얼만큼 바쁜 사람인가를 알게 했다.

지월스님은 한마디로 이 마을의 ‘마당발’이다. 마을의 대소사에 그가 없으면 찌개에 다시마가 빠진 듯하다.

한 번은 2년여 동안 마을 행사에 침묵했더니 “베풀려고 중된 것 아니냐. 마을에서 필요하면 도와야지, 네 걱정만 하느냐”며 마을 사람들로부터 들어오는 거대한 호통에 다시금 허허로이 참견하게 됐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면 마음에 안드는 것 투성이에요. 직접 나서서 이것 저것 일을 해야 속시원하고 좋지, 가만 있으면 답답해서….”

그는 마을일도 보고 농사도 짓고 늦깎이에 결혼도 해서 자녀도 둘을 둔, 요상한(?) 스님이다. 나서기 좋아하는 사람, 지월스님의 행자생활은 젊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마을과 우리 집안은 불교가 뿌리깊이 박혀 있어요. 어려서 엄마따라 성불사까지 무, 미역, 쌀 등을 메고 다니기도 했죠. 어느날 한 스님이 그랬대요. 이 집안에서 스님이 나올 거라고요. 어머니는 그럴 사람 없다고 했는데, (후훗) 제가 나왔네요.”

특별한 인연도 없는 듯 장성하면서 자연스레 행자생활을 거쳐 4년 전에야 비로소 ‘진짜 스님’이 된 그는 “모든 믿음은 적당한 게 좋다”는 철학을 설파, 불교도 너무 광신적으로 빠져선 안된다고 피력했다.

좀 이상한 듯한 말이지만 적당해서 나쁠 게 뭐 있으랴. 그래서인지 그가 짓는 마을 언저리의 절도 약간의 시줏돈과 자신의 사비를 털어 마련하고 있다고 귀띔한다.

지월스님은 10여년전 명맥이 끊긴 1백50년된 줄다리기 전통을 다시 이었으며, 경로잔치와 경로여행을 치르기도 했다.

요즘은 마을회관과 찜질방을 동시에 추진하는 일에 나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앞으로는 거재마을이 옛 두부마을의 전통과 명성을 다시 찾을 겁니다. 예전엔 이곳이 두부마을로 근방에선 꽤 유명했어요. 공장 등이 들어서며 비위생적이라는 소리가 나자 슬며시 사라졌지만 다시 그 전통을 찾아가는 게 이 마을의 활로일 거라는 생각이에요.”

마을을 움직이는 또하나의 힘은 기금. 관리는 당연 지월스님의 몫인데 천원짜리 영수증 하나에도 꼼꼼히 챙기고 몇백원짜리에도 거래은행을 찾는 통에 ‘기금운영의 투명성’은 자연스레 확보한 셈.

지월스님의 확고한 철학, “내가 도움되는 일이면 한다. 돈관리는 투명해야 한다. 사람보고 일하지 권위보고 일하는 건 사절한다”는 그의 말마따나 정치인이라고, 윗사람이라고 으시댔다간 그에게 된 코 당한 사람이 한 둘 아니다.

한편으론 얼마전 타계한 걸레스님, 중광을 엿보듯 술마시고 고기먹는 것은 기본인 파행적인 그의 행보는 “어떤 것에도 구애받아선 안된다”는 ‘괴짜’의 모습을 담고 있다. 청당동엔 거재마을이 있고 그 속에는 지월스님이 있다. 

김학수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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