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철 선생.
임시정부와 교민단체의 핵심간부로 활약-여운형 등과 신한청년당 창당 독립운동 전개, 임시정부 부흥운동독립기념관(관장 김삼웅)은 국가보훈처와 공동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 및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약한 김 철 선생을 10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고 그 공적을 기리는 전시회를 개최한다. 1886년 10월15일 전라남도 함평군 구봉마을에서 태어난 선생은 1917년 독립운동에 뜻을 품고 상하이로 망명했고, 1918년 민족자결주의가 제창되자 여운형 등과 함께 신한청년당을 창당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19년 초 선우혁·서병호 등과 함께 비밀리에 국내로 들어와 3·1운동 봉기를 도왔으며 다시 상하이로 돌아와 신한청년당을 중심으로 임시정부 수립운동을 폈다. 같은해 4월10일 제1회 임시의정원의 전라도 의원으로 당선됐고, 제2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임시정부의 재무위원 겸 법무위원으로 선임됐다. 특히 8월5일 임시정부 교통차장에 임명돼 당시 취임하지 않았던 총장 대리를 겸하면서 맹활약했다.또한 선생은 1922년 김 구 등과 시사책진회를 결성해 국민대표회의의 개최를 앞장서 추진했으며 1924년 임시정부 회계검사원 검사장, 1926년 국무령제 정부의 각료인 국무원으로 활동하면서 임시정부의 부흥에 힘썼다.1930년에는 안창호·김 구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 조직에 동참하고 국무위원제 정부의 군무장이 됐다. 1932년에는 상하이 한인동포들의 교민단체인 대한교민단 정치위원으로 선출되고, 같은 해 11월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에 임명되는 등 임시정부와 교민단체의 핵심간부로 활약했다.윤봉길 의거 이후 상하이에서 항저우로 이동한 임시정부에서도 1934년 국무위원으로 재차 선임된 뒤 재무장의 일을 맡아 재정확보에 힘을 쏟은 선생은 저장성 항저우에서 1934년 6월29일 신병으로 서거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