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독립운동가 - 현익철 선생(1890∼1938)
한국독립당·한국국민당·조선혁명당 등 우파3당 통합회의 중 친일 앞잡이에 피살독립기념관(관장 김삼웅)은 국가보훈처와 광복회 공동으로 남만주 독립운동의 최고 중추기관인 정의부·국민부·조선혁명당·조선혁명군을 진두지휘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사위원회 군사위원을 지낸 현익철 선생을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현익철 선생은 평안북도 박천에서 태어났다. 자세한 성장과정은 드러나지 않지만, 경술국치 직후인 1911년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모색했다. 하지만 여의치 않자 귀국해 1912년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일본은행권을 위조하려다 피체돼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1918년 다시 중국 서간도로 망명한 선생은 흥동학교 교사로 민족교육에 힘썼다. 그러던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서간도 한인동포들의 자치기관이자 독립운동 조직인 한족회에 가입하고 임시정부가 서간도에 설치한 군정기관인 서로군정서에도 참여해 대일투쟁을 전개했다.이와 함께 선생은 무장투쟁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현정경·이호원 등과 함께 1920년 서간도 관전현에서 광한단을 조직해 활동했다. 4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일제의 침략기관을 파괴하고, 친일주구배를 처단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는데 앞장섰다. 특히 1921년 동지들을 국내로 파견해 평북 정주일대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다가 이들이 일경에 피체됨에 따라 그 배후로 밝혀져 다시 3년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직후인 1924년 서간도로 또 다시 망명한 선생은 남만주의 독립운동 통합조직인 대한통의부에 가담하고, 외무위원장을 맡아 중국 관헌들과의 교섭은 물론 임시정부와도 긴밀하게 연락했다. 나중에 통의부가 정의부로 확대되자 중앙집행위원 겸 재무부장으로 활약하며 한인자치와 독립군 투쟁의 기반을 마련하는데 힘썼다.삼부통합운동으로 1929년 국민부가 결성되자 여기에 참여한 선생은 한인동포들에 대한 자치행정의 수반인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됐다. 또한 국민부를 중심으로 조선혁명당·조선혁명군 등 당·정·군의 조직체계를 세우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1931년에는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장 겸 조선혁명군 총사령을 맡아 중국 지방정부와 한중연합투쟁을 추진했다. 여러 차례 회합해 한중연합투쟁을 실현시켜 가던 중, 일경에 또 다시 피체돼 7년형을 받고 신의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그럼에도 선생의 독립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1936년 병보석으로 출옥 후 일경의 감시를 피해 상해로 망명한 것이다. 상해에서 임정요인들이 거주하고 있던 남경으로 옮긴 뒤, 1937년 과거 동지들과 함께 조선혁명당을 재건해 활동하면서, 중국 관내의 우파민족연합전선인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광복전선)에 참여했다.이후 임시정부 군사위원회 군사위원으로도 선임된 선생은 우파 3당인 한국독립당·한국국민당·조선혁명당의 통합을 제의했다. 이에 따라 1938년 5월7일 조선혁명당 본부가 있던 중국 장사 남목청에서 3당 통합회의를 진행하던 중, 친일파의 사주를 받은 청년의 총격으로 순국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는 국장으로 선생을 장사의 악록산에 안장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독립기념관에서는 선생의 뜻과 공적을 기리기 위해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하고 관련 자료와 사진을 9월 한달 동안 전시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