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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악한 일본의 권력자 계급이여!”

“잔악한 일본의 권력자 계급이여!”

등록일 2006년08월01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이른바 ‘괴사진’이라 알려진 박 열과 가네코의 사진(뉘우치는 기색이 전혀 없는 대역죄인을 감옥 안에서 특별 대우했다고 야당에서 정치문제로 삼으려고 이 사진을 인쇄 살포했다) 8월의 독립운동가 - 박 열(1902.2.3∼1974.1.17) 일본지역에서 아나키즘운동전개, 일왕 폭살 계획도“너희들 잔악한 일본의 권력자 계급이여! 타국, 타인종 또는 타민족 폭도에 관해서는 아름다운 정의·인도의 이름하에 거의 광적으로까지 흥분해서 소란을 피우며 나대는 주제에 자기들의 그것에 대해서는 바람이 지나가는가 정도로 받아들이고 흘려보내는 가장 파렴치한 너희들 일본 권력자 계급이여!생각해 보라. 과거 십 수 년 사이에 너희들이 우리 조선민족에 대해서 한 잔악의 수 없음을. 그것이 얼마나 단호한 것이며 또 그를 위하여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게 했는가를….”(박 열, ‘한 불령선인으로부터 일본의 권력자 계급에게 전한다’중에서) 독립기념관(관장 김삼웅)은 국가보훈처와 공동으로, 일본지역에서 아나키즘(무정부주의) 운동을 전개하고, 일왕 폭살을 계획한 박 열 선생을 2006년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박 열 선생은 1902년 3월12일(음력 2월3일) 경상북도 문경에서 태어났다. 선생의 처음 이름은 혁식이었으나 어려서부터 열로 불렸고, 호적에는 준식으로 되어 있다. 선생은 1919년 경성고보 재학중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친구들과 함께 태극기와 격문을 살포하는 등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선생은 저명한 아나키스트들과 사회주의자들을 직접 찾아가 교류하면서 그들의 반제국 자유의식과 아나키즘에 심취하게 됐다. 아나키즘을 접한 선생은 보다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1920년 11월 도쿄에 거주하고 있던 고학생들을 규합해 의혈단을 조직하고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던 1922년 2월경 선생은 평생 동지이자 아내인 가네코 후미코를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몇 차례 만남을 통해 사상공감에 이르렀고, 민족적 차이를 넘어 계급적 동지로서 함께 반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이후 선생은 아나키즘단체인 흑도회에 참여하고, 그 기관지인 흑도의 발간 책임을 맡아 선전활동에 주력했다. 또한 선생은 식민체제 타도를 목표로 하는 의열투쟁노선을 천명하고, 1922년 말 직접행동 조직인 흑우회를 조직해 활동했다. 이때 선생은 민중운동·후토이센징·현사회 등의 잡지를 통해 항일의식을 고취했고, 서울과 도쿄의 여러 사회운동단체와 연대활동을 전개하면서 민중의 권익신장에도 힘썼다. 1923년 4월 선생은 불령사를 조직해 본격적인 의열투쟁을 추진했다. 그 해 가을 일본 태자의 결혼식 소식을 전해들은 선생은 의열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심하고, 거사에 사용될 폭탄 구입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던 중 1923년 9월 도쿄에 대지진이 발생했고, 이를 기회로 일제는 한국인들과 일본내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와 탄압을 자행했다. 이때 선생과 가네코 후미코를 비롯한 불령사 회원들도 피체됐고, 경찰의 취조 도중에 일왕 폭살을 위해 추진한 폭탄 반입계획이 드러나게 됐다.1923년부터 1925년에 걸친 총 20여 회의 조사과정에서 선생은 일왕을 폭살하기 위해 폭탄을 구입하려 했다고 당당히 밝혔다. 그리고 사형 판결이 나자 선생은 ‘재판장, 수고했네. 내 육체야 자네들 맘대로 죽이지만, 내 정신이야 어찌하겠는가’라고 일갈하며, 불굴의 독립의지와 민족정신을 표출했다. 이후 무기형으로 감형됐지만 일제 패망 이후에도 ‘대역사범’이라는 이유로 석방되지 못하다가 1945년 10월27일에 풀려났다.출옥 후 선생은 1946년 5월 백범 김 구 선생의 부탁을 받아 윤봉길·이봉창·백정기 선생 등 3열사의 유해를 발굴해 고국으로 송환하는 책임을 맡았다. 1949년 영구 귀국한 선생은 재단법인 박열 장학회를 설립하는 등 후학들을 위한 장학 사업에 노력하다가 한국전쟁 중에 납북됐다. 북한에서 선생은 조소항·엄항섭 선생 등과 함께 통일을 위해 노력하다가 1974년 1월17일 평양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현재 선생의 유해는 평양 신미리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특설묘지에 묻혀 있다. 이러한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정부는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독립기념관에서는 선생의 뜻과 공적을 기리기 위해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하고 관련 자료와 사진을 8월 한달 동안 전시할 계획이다.

정리/이정구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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