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항섭 선생의 묘(엄항섭 선생의 묘는 북한 신미리 애국열사능에 있다. 비석에 1898년 10월15일생으로 표기돼 있는데 이것은 양력이다.)
엄항섭 선생 (1898. 9.1∼1962. 7.30)김 구 선생 최측근 보좌, 독립의지 대내외 천명‘선생님! 선생님! 민족을 걱정하시던 선생님의 얼굴을 아침마다 뵈었는데, 내일 아침부터는 어데 가서 그 얼굴을 뵈오리까. 선생님은 가신대도 우리는 선생님을 붙들고 보내고 싶지 아니합니다. 남은 우리들은 목자 잃은 양떼와 같습니다. 이런 민족을 버리시고 차마 가실 수가 있습디까선생님! 우리들은 선생님이 끼치신 뜻을 받들어 선생님의 발자욱을 따라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을 위하여 삶으로써, 선생님의 신도되었던 아름답고 고귀한 의무를 다하기를 선생님의 위대하신 영전에 삼가 맹세합니다.’- 엄항섭이 김 구 선생의 영전에 바친 추모사 중에서(1949)독립기념관(관장 김삼웅)은 국가보훈처, 광복회와 공동으로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선전부장을 지낸 엄항섭 선생을 2006년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엄항섭 선생은 1898년 9월1일(음) 승지를 지낸 부친 엄주완의 아들로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주록리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선생의 성장과정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다만 1919년에 보성법률상업학교(현 고려대학교 전신)를 마쳤다는 것만 전해진다. 보성법률상업학교 재학 당시 3·1운동을 경험한 선생은 일제의 압박으로 국내에서 자신의 뜻을 펼치기 어려움을 인지하고, 중국 상해로 망명했다. 여기에서 백범 김 구 선생을 만났고, 그와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활동했다.엄항섭 선생이 임시정부에 몸담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임시정부는 정부로서의 조직을 유지하기 힘들 정도로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태에 놓이게 됐다. 이에 선생은 불란서 조계의 공무국에 취직해 자신이 받은 월급으로 임시정부 요인들의 끼니를 해결하는 한편, 일본 영사관으로부터 임시정부를 보호하는 역할을 맡았다.1932년 이봉창·윤봉길 의거로 임시정부가 상해를 떠나 유랑생활을 시작하자 김 구 선생을 최측근에서 보좌하며 임시정부의 활동과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대내외에 알리는 선전활동에 힘썼다. 1940년 5월8일에 한국국민당·재건 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 등 3당을 통합, 새로이 한국독립당이 결성되자 선생은 한국독립당의 중앙집행위원으로 활약했다. 이후 임시의정원 의원, 주석판공실 비서, 그리고 1944년 좌우합작 정부에서는 선전부장으로 활약하면서 임시정부에 대한 미주동포들의 재정지원을 이끌어내는데 온 정성을 기울였다. 한편, 선생의 부인 연미당(1908∼1981,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여사 또한 독립운동가다. 연미당 여사는 중국 장사에 있는 남목청에서 3당 통일회의가 열리고 있을 때 이운한의 저격을 받아 중상을 입은 김 구 선생을 정성으로 간호했고, 1938년 10월에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원이 돼 선전과 홍보활동에 주력했다. 1943년 2월 중경에서 한국애국부인회의 조직부장으로 선출돼 반일의식을 고취하는 방송을 담당하며 활동했다.광복 이후 엄항섭 선생은 1949년 4월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열린 ‘남북조선제정당 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에 참석하는 등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하다가 1950년 9월에 납북됐다. 북한에서도 선생은 통일을 위해 진력하다가 1962년 7월30일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89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독립기념관에서는 선생의 뜻과 공적을 기리기 위해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하고 관련 자료와 사진을 4월 한 달 동안 전시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