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출옥한 신홍식 선생.
평양 남산현교회 담임목사로 민족운동 전개3월의 독립운동가 동오 신홍식 선생 (1872.3.1∼1939.3.18)독립기념관(관장 김삼웅)은 국가보훈처, 광복회와 공동으로,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으로 3·1운동을 주도한 동오(東吾) 신홍식 선생을 2006년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신홍식 선생은 1872년 3월1일 충청북도 청주군 문의면 문산리에서 아버지 신기우와 어머니 최살랍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젊어서는 뚜렷한 직업 없이 과거시험에 전념해 생활고에 시달리는 등 불우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선생은 1904년경 기독교에 입교해 신앙 활동을 시작하고, 이것이 선생의 일생에 큰 변화의 계기가 됐다. 1906년 충청남도 천원군 직산면 직산교회 전도사로 본격적인 목회활동을 시작한 선생은 1910년 감리교 계통의 협성신학교에 입학해 1913년 졸업했다. 졸업 당시 졸업생 대표로 연설을 하는 등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했다. 1913년 집사목사를 안수 받은 후 공주지방 순회목사로 부임했으며, 1917년에는 평양 남산현 교회로 파견됐다. 평양은 일제의 침략에 맞서 싸운 민족적인 기독교 세력이 강한 지역이었다. 이곳에서 선생은 마음속에 품어왔던 참담한 민족의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민족운동가로 변신을 꾀한 것이다.1919년 2월 중순 손정도 목사의 권유로 이승훈 선생을 만나 3·1운동에 참여했다. 서울 모임에서 평안남도 지역의 동지 모집 역할을 담당한 선생은 평양 지역의 목회자들인 아펜젤러기념교회 김찬홍 목사, 이문리교회 주기원 목사, 신양리교회 김홍식 목사와 접촉해 평양 지역의 시위를 주도적으로 전개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역사적 날인 3월1일 오후2시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석해 3·1 독립운동을 주도했으며, 이 때문에 경성감옥(현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돼 2년의 수감 생활을 했다. 재판과정에서도 일제의 강제 병탄 반대와 독립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여 일제의 판사들에게 경종을 울렸다. 선생은 1921년 11월4일 만기 출옥하고, 이듬해에 인천 내리교회 목사로 부임해 목회활동을 재개했다. 1922년에는 인천내리교회사를 서술했고, 1925년 창립된 ‘흥업구락부’에 가입해 활동했다. ‘흥업(興業)’은 표면적으로 산업을 일으킨다는 취지였지만 실제적으로는 조선의 독립을 추구하는 민족주의 계열의 단체였다. 1930년대에는 흥업구락부 회원 일부와 기독신보계열의 개혁적 인물들과 결합해 ‘적극신앙단’을 결성하고 적극신앙운동을 전개했다. 이는 신앙운동을 가장했지만 독립에 대비할 구성원들을 훈련시켜 실력을 양성한다는 민족운동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큰 뜻을 다 펴지 못한 채 병마에 시달리다 1939년 3월18일 끝내 운명을 달리했다. 이러한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정부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이와 관련 독립기념관에서는 선생의 뜻과 공적을 기리기 위해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하고 관련 자료와 사진을 3월 한 달 동안 전시할 계획이다.■ 신홍식 선생 주요공적 요약○1917∼1919 평양 남산현교회 담임목사로 민족운동 전개○1919 민족대표로 3·1운동 독립선언식에 참여○1925∼1938 흥업구락부와 적극적인 신앙운동으로 민족의식 고취○1962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