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 이승희 선생은 1847년 2월19일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포리에서 아버지 한주 이진상과 어머니 흥양 이씨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의 아버지 이진상은 구한말 대표적인 유학자로, 퇴계학을 토대로 성리학을 재정립해 ‘한주학파’라는 독창적인 학문세계를 구축했다. 이에 선생은 아버지의 학문세계를 계승·발전시켜 항일독립운동의 이념으로 삼았다. 을미사변에 분개한 선생은 곽종석, 장완상 등과 함께 각국 공사관에 포고문을 보내며 일제의 만행을 성토했다. 일제의 침략야욕이 점차 심화되는 가운데 1905년11월 을사늑약이 강제되자 급히 서울로 올라와 장석영, 이두훈 등과 상소를 올려 을사오적을 목베어 죽이고 늑약을 무효화할 것을 주장했다. 선생은 이 때문에 대구 경무서에서 옥고를 치르면서도 당당하게 옥중투쟁을 전개했다. 또한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듣고 만국평화회의와 각국 정부에 편지를 보내 일제의 침략상을 낱낱이 폭로하고 국제여론의 관심을 이끌어내고자 했다. 국권회복을 위한 선생의 거듭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을사늑약 이후 일제의 탄압이 점차 심해지자 선생은 보다 근본적인 독립운동 방법을 찾고자 망명을 결심했다. 이에 1908년 62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건너가 이상설, 안중근 등과 함께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선생은 이주 한인의 집단거주지 및 항일독립운동기지로 삼고자 중국 길림성 밀산부 봉밀산 일대에 한흥동을 건설하고 한민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또한 중국인 동지들과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한인공교회를 창설하고 유교이념을 통한 항일독립투쟁에 매진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16년 2월 중국 봉천에서 서거했다. 이에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77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이와 관련해 독립기념관에서는 선생의 뜻과 공적을 기리기 위해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하고 관련 자료와 사진을 2월 한 달 동안 전시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