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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 어린 탄압, 굴하지 않은 독립운동

등록일 2004년03월13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독립운동이 활발히 전개됐던 마을(위) / 현재는 독립운동의 흔적이 사라진채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아래). 여성독립운동 활발, 당시 20·30대층 주류 아산지역 독립운동사 일제치하 반세기를 훌쩍 넘어섰으나 아직도 청산되지 않는 과거, 그 날의 독립의지를 제고해 보고자 하는 취지에서 충남시사신문사가 2회에 걸쳐 아산의 독립운동사를 조명해봤다. 마지막으로 일제의 탄압과 독립지사에 대해 알아본다. <편집자 주> 3·1운동 발발 때부터 시작된 일제의 무력적 진압은 3?1운동이 점차 지방으로 확산된 3월7일에 첫 위수 지역을 벗어난 병력 이동으로 더욱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일본 육군 차관은 3월8일자 조선헌병대사령관에게 통첩을 보내 신속한 대응과 사전 예방에 주력할 것을 강요했다. 일본 원경수상도 조선총독에게 지령을 보내 ‘엄중한 처치’를 지시했다. 이 무력적 진압정책은 4월1일에 이르러 극에 달하게 됐다. 조선주차군사령관은 통달을 통해 ‘군대는 단연 소요의 강압 수단을 사용한다’는 공식적인 지시를 내리는 한편 독립만세 군중을 와해시키려 했다. 이에 고삐가 풀린 것처럼 일제의 탄압은 ‘광기’를 띠게 됐다. 일제는 조선주차군 보병, 헌병, 경찰, 헌병과 경찰 보조원뿐만 아니라 재향군인, 소방대, 거류민단 등 각종 단체와 일본 민간인까지 동원해 무력적 진압을 자행했다. 또 이를 위해 일제 군경들은 집중 배치체제에서 3·1운동이 전개되면서 ‘소요지’나 ‘소요 예상지’를 중심으로 분산 배치체제로 전환시키고 관할 위수지역을 변경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외 일제는 일본 국내주둔군 병력을 4월4일 헌병 약 65명과 헌병 보조원 보병 약 3백50명 및 보병 6개 대대를 조선에 파견하기로 결정해 3·1운동을 진압하기 위한 무력을 증강했다. 일제 탄압의 실상 아산지역의 3?1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은 온양헌병대와 관내 각지에 있는 헌병주재소 및 보병 등에 의해 이뤄졌다. 3월11일 온양 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독립만세를 부른 후 다음날인 12일에도 독립만세운동이 있을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온양 헌병대는 헌병분대장 이하 13명을 출동시켰다. 이들은 학교 앞에 임시 헌병대 파출소를 설치해 의심가는 학생을 마구잡이로 구타하는 등 탄압을 자행하면서 이 지역에 대한 일제의 무력적 대응을 시작했다. 12일 온양 시장에서 주동 인사 5명을 체포했고 이어 14일 온양에서는 현창규 등이 시장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자, 일제는 헌병 6명과 수비대 보병 10명을 출동시켜서 만세 군중을 제지하고 22명을 체포했다. 3월 말인 31일에는 온양 북방 1리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있어 군대와 협력해 발포 등 무력 진압으로 만세 군중을 해산시켰다. 또 아산 인근의 면 지역 50여 개소에서 횃불만세운동이 전개되자, 일제는 신속히 헌병대를 출동시키고 군대의 협력을 받아 발포하면서 만세 군중들을 해산시키고 주동 인사 12명을 체포했다. 4월2일에는 아산 신창에서 이덕균 등이 학성산에서 횃불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고창한 후에 하산해 헌병 주재소와 보통학교 및 면사무소를 습격하자, 일제는 헌병 7명과 보병 3명을 출동시켜 일제 기관을 파괴하는 등 항일운동을 전개하는 군중들을 진압시켰다. 4월4일에는 선장 시장에서 정수길 등이 중심으로 시장 군중들이 독립만세를 부르고 오후 3시경 군중들은 헌병 선장주재소로 가서 투석을 하면서 주재소를 파괴하자, 헌병 조장 장사가 발포해 해산시켰다. 이와 같은 일제의 탄압으로 수백명이 체포돼 태형의 형벌과 옥고를 겪었다. 각 지역의 수형자 명부를 조사한 바에 의하면, 온양에서 태형 90도 1명, 60도 4명, 40도 14명 합계 18명, 송악에서 90도 6명, 60도 35명 합계 41명, 영인에도 모두 60도 17명, 선장에서 60도 52명, 40도 57명 합계 1백9명, 전체 합계 1백85명이 처벌을 받았다. 재판에 회부돼 옥고를 치룬 14명과 강달성이 있으며, 경성복심법원의 판결에 불복해 박태화, 김양순, 김금복, 강순화, 손천일 5명은 ‘자기의 행위는 조선 민족으로서 정의·인도에 따른 의사 발동’이라며 상고를 제기했다. 또한 선장의 정수길, 김천봉, 서몽조, 임천근, 오상근 5명은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6월의 형을 선고 받았고, 성배호도 징역 고등법원에서 1년의 형을 선고 받았다. 탄압에 대한 반격 아산지역의 특징은 3월 말과 4월 초 두 번에 걸쳐 격렬히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이었다는 것. 1차 독립만세운동이 온양을 중심으로 전개됐으나 2차 독립만세운동은 온양을 포함한 아산지역의 각 면인 탕정, 염치, 배방, 송악, 둔포, 신창, 영인, 인주, 선장 등 10개 면에서 독립만세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충남지방에서 3·1운동은 3월27일부터 지역이나 독립만세운동의 횟수가 점차 증가하면서 3월31일에 급격히 확산돼 4월4일에 극성을 이뤘고 8일까지 활발히 전개되다가 9일부터는 급속히 약화됐다. 아산지역의 3?1운동은 이와 같은 충남지방의 양상과 궤를 같이해 3월31일과 4월1일에 군내 탕정, 염치, 배방, 송악, 온양, 둔포 지역에서 활발히 전개됐다. 독립운동이 평화적 만세운동을 벌이기도 했으나 폭력적으로 일제를 압박해 나가기도 했다. 4월1일 둔포 운용리의 마을 주민들은 만세운동 외에 소유 광혈(온천수 나오는 곳)을 20여 개소를 파괴하기도 했다. 2일에는 신창의 읍내리 주민 2백여명이 학성산에 횃불만세를 부르고 이덕균과 박태화의 주도로 만세군중들은 면사무소와 헌병 주재소 및 보통학교로 이동하면서 문과 유리창을 부쉈다. 4일에는 선장의 2백여명의 면민들이 군덕리 시장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오후 3시경 정수길, 김천봉 등의 주도로 곤봉을 휘두르며 헌병 주재소를 진입해 투석 등으로 주재소와 창문을 파괴했다.
주아영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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