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장면에 건립될 “기미년조선독립운동 및 무인년 멸왜운동기념비”조감도.
일제치하 최고 강점기 때 독립운동 펼쳐
아산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사건은 ‘멸왜운동’이다. 1932년 일제의 강점기때 천도교인을 중심으로 펼쳐졌던 독립운동이기도 하다. 한 교파의 독립운동이고, 일본을 속칭하는 ‘왜’라는 말 때문에 과거사는 물론 현대사까지 이 부분을 언급하는 것을 꺼리고 있다.
선장면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임천근씨의 손자 임순흥(52·서울 영등포구 거주)씨는 “매일 단을 깨끗이 쓸고 닦고 새벽마다 기도를 올리며 독립운동을 했다고 전해 들었다”며 “모진 고문과 재산탕진에도 아랑곳없이 멸왜운동을 펼쳤고, 독립이후에도 그렇게 기도를 드렸던 것으로 안다”고 회고했다. 또 정수길씨의 손자 정해곤씨도 “어디를 찾아봐도 멸왜운동에 대한 얘기가 없는 것으로 봐선, 정부수립 이후에도 인정을 받지 못한 것 같다”며 “그러나 당시 자료가 일부 자손들에게 남아 있다. 이같은 역사가 후손에 남겨져 한다”고 말했다.
새삼 멸왜운동이 주목받는 것에 대해 현재의 정부도 꺼려하기는 마찬가지다. 일본과의 외교관계에 타격을 줄 수도 있고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왜’라는 말 자체를 쓰기가 거북하기 때문.
독립운동가의 몇몇 자손들은 그래도 우리나라의 정신적인 뿌리와 나라의 자립, 자족을 주창했던 독립운동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서는 ‘멸왜운동’이 새롭게 재조명 돼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선장 3·1운동
멸왜 정신이 면면이 살아있는 곳은 바로 선장이다. 멸왜운동만큼이나 선장면의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몇몇 자손들에게만 조부의 독립운동 당시 일제치하의 판결문, 독립운동을 했던 당시의 메모 등이 남겨져 있어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뿐이다.
또한 다른 면과는 달리 선장면은 독립운동도 늦게 시작됐다.
박종갑(선장면)씨에 의하면 “자세한 문헌은 없어도 선장면의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선친께서 서울의 독립운동부터 펼치고 모든 일을 마무리하고 내려왔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선장면의 독립운동은 그래서 3·1운동보다 한달이나 늦은 4월4일에 있었다. 이 독립만세운동은 정수길, 서몽조, 임천근, 오상근 등의 주도하에 면민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무엇보다 주목할 만한 것은 모든 면민들이 참여했다는 것. 대부분의 아산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은 몇 개의 리단위 중심으로 이뤄졌지만 선장면의 경우 어느 리도 소외되지 않고 모두 참여했다는 것에 주목 되고 있다.
특히 독립운동을 주목했던 정수길 외 3인은 전국 각지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주도하고 난 뒤 군중과 더불어 독립만세를 불러 독립선언을 성원할 것을 모의해 시장에서 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결의했다.
이들은 지금은 쓰레기 매립장으로 말썽을 빚고 있는 군덕리 시장에서 약 2백여 명의 시장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불렀다. 오후 3시경에는 곤봉을 휘두르며 군중을 지휘해 면내의 헌병 선장주재소에 몰려가 투석 등으로 주재소와 창문을 파괴했다.
특히 김천봉은 군중들 중에서 솔선해 군중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고 헌병주재소를 파괴하는데 앞장섰다. 일제 헌병 조장 장사손삼낭이 발포해 만세군중을 강제로 해산시켰다. 또한 동일 군내 1개소에서 오후 8시 산 위에서 횃불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10시경에 해산하는 독립만세운동을 열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잡혀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
현재는 이같은 선현들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선장면에 “기미년 조선독립운동 및 무인년 멸왜운동기념비”을 축조하기 위해 작년 추경에 예산이 올려진 상태다.
아산의 독립운동가 2백20명중 1백80여명이 선장면 출신이라면 선장을 고향으로 둔 후손들은 대부분이 독립운동가의 자손인 셈이다. 이 기념비에는 선장면의 1백80명 독립운동가를 비롯해 아산지역 40명의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이 새겨져 독립운동사를 재조명하게 될 예정이다.
기타면의 기타 3·1운동
이외 독립만세운동으로 3월 31일 탕정, 염치, 배방 및 송악 등 여러 면지역에서 각 마을의 산 50여 개소에서 횃불을 올리고 2천5백여 명의 면민들이 독립만세를 불렀다.
염치 백암리에서는 영신학교 여교사인 한연순과 이화학당 학생인 김복희가 주도해 해가 진 후 마을의 북쪽 산 위에 올라 횃불을 올리고 주민 약 20명과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또 중방리는 오봉환이 고종의 인산 때에 상경해 입수한 독립선언서를 가져 와서 박동은 등과 의논하고 마을 주민들을 설득해 독립운동을 했다.
송악의 독립만세운동은 현재까지 밝혀진 바에 의하면 이날 하루뿐이었다.
수형자 명부에는 41명이 보안법 위반으로 온양 헌병대분견소에서 태형의 형벌을 받았다. 마을별로는 관평리 16명, 동화리 13명, 거산리 8명, 역촌리와 송학리 각각 2명으로 5개 리에 걸쳐 분포돼 있으며, 관평리와 동화리 주민들이 29명으로 전체 70.73%를 차지하고 있다.
단 하루뿐이지만 태형기록을 보면 격렬한 횃불만세운동을 전개한 것으로 보인다.
이어 다음날인 4월1일에는 탕정, 염치, 배방 외에 온양과 둔포에서 횃불만세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둔포는 운용리 마을 주민들이 횃불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불렀으며, 당시 일본인 소유인 광혈 20여 개소를 파괴하는 전투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4월 2∼3일에는 영인의 횃불독립만세 외에 인주의 공세리와 걸매리 및 둔포 등의 해안 지역에서 일제히 횃불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부르는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아산지역의 3·1운동은 3월 중순인 11일부터 12·14·15일까지 제1차 독립만세운동과 3월 말, 4월 초순인 3월31일부터 4월 1∼4일까지 제2차 독립만세운동으로 9일에 걸쳐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이 있었다.
그날 함성 이어져야
그날의 함성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그날을 기념할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게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목소리다. 송악면 독립운동을 주도한 한영순씨의 외손자 진대영(온천동·63)씨는 사실 후손이라고 해도 그때를 잘 모르기는 하지만 그날에 대해 알 수 있을만한 자료나 기념비가 없어 아쉽다고 토로했다.
최근 선장면이 도비와 시비를 들여 기념관을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분주하다. 그러나 이 일을 추진하면서 어려움도 많았다고. 비용도 비용이지만 독립운동에 대한 인식이 아예 사라지는게 아닌지 걱정스럽다고 토로한다. 지금의 독립운동이 우리나라의 자주성과 정신문화의 상징인데 그보다는 독립운동지사 후손들이 “조상의 뼈를 묻기에 바쁘다”는 어이없는 혹평마저 듣는 실정이다.
일본문화와 서구 유럽의 문화가 뒤죽박죽 들어와 한국의 정취마저 사라지는 지금, 옛 선현들이 왜 그토록 독립운동을 왜 쳤는지를 생각할 때다. 또한 그토록 지키고 싶어했던 조국의 의미를 조형물이라도 제대로 세워 기념하는 것은 어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