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강탈하기 위해 허물었던 온궁 「영괴첩」 온양별궁 전도.
3월11일~4월4일까지 온양 등 각지에서 전개, 지도자 중심보다 민간인 주도 운동
3?1운동의 횃불은 아산시 전역에 고루 피워 올랐으나 고증된 것은 온양, 영인, 신창, 선장 등 4곳이 주요했던 것으로 고증되고 있다. 서울의 3·1운동이 종교지도자로 시작했다면 아산은 이미 동학농민전쟁때부터 민중 봉기로 자체적인 독립운동을 벌여왔다.
반외세를 외친 아산지역
우선 아산지역의 반외세·항일 의식은 청일전쟁을 계기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동학농민전쟁을 진압하지 못한 조선 정부는 청에 원병을 요청하자, 청은 이를 빙자해 조선에서 약화된 영향력을 만회하고 종주권 행사를 강화하기 위해 섭지초 제독으로 하여금 병력 1천5백명을 이끌고 아산만에 도착해 선발대 7백명을 백석포에 상륙시키고 정여창이 군함 2척을 끌고 인천에 도착했다. 청군의 아산 주둔으로 아산 지역민들은 인·물적 피해를 강요당했다.
이때부터 시작된 외국의 강탈은 일제가 청나라에 승리하면서 횡포가 극에 달했다. 보릿고개에도 공물을 바쳐야 할 정도로 조세부담이 컸다.
일제의 침략이 계속되는 과정에서 온양의 온천이 일본인의 소유로 강탈당했다.
1904년 조선시대 역대 왕실의 휴양지로서 온궁까지 지어 관리해 오던 온양 온천에 수십 명의 일본인이 궁내부의 허가를 빙자해 온천 시설을 모두 철거하고 인근의 민가를 빼앗아 토지경작을 금한 뒤 온천장 신축을 기도했다. 대한제국의 외부는 온천의 운영권이 민간에게 있는 만큼 궁내부의 허가를 받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엄중히 항의했으나 일본인들은 끝내 이를 묵살하고 강점했다.
이때부터 아산의 독립운동은 시작됐다.
온양의 3?1운동
아산지역의 3?1운동은 타 지역보다는 조금 늦은 3월11일에 최초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해 4월4일까지 전개됐다.
온양 3?1운동은 3월11일부터 시작됐다. 온양의 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학교 운동장에 모여서 독립만세를 부르며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학교장이 만세를 부르는 학생들을 설득하자, 일단의 학생들은 자진 해산했다.
자진 해산을 한 학생들은 학교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한 것을 계기로 온양 시장으로 나아가 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결의했다. 이 정보는 일제에 의해 탐지됐다.
즉 온양 헌병대는 이튿날인 장날을 이용해 만세운동이 있을 것을 탐지하고 학교 부근에 임시로 파출소를 설치했다. 헌병들의 판단으로 의심가는 학생들이 있으면 구타를 해 독립만세운동을 사전에 저지하려는 시도를 했다.
일제의 폭력적 사전 저지에도 불구하고 이튿날인 3월12일에 보통학교 3·4학년 학생들은 동맹 휴교를 하고 온양 시장으로 나아가 학생 30여명을 중심으로 시장 군중 2백여명이 합세해 독립만세를 부르며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다.
3월14일 온양 장터에서 또 한번의 독립만세운동이 있었다. 서울의 30141운동에 참여했다가 천도교 권병덕의 지시를 받고 귀향한 현창규가 서만수, 권태원, 김치삼 등과 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결의했다. 이들은 온양장터로 나아가 서울에서 가져온 독립선언서를 시장 군중에게 배부하고 공립보통학생 1백여명과 시장 군중들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이어 15일에는 1백여명의 군중들이 독립만세를 불렀으며, 4월1일에는 횃불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영인면 3?1운동
영인 3?1운동은 3월14일에 있었다. 아산의 구읍인 아산리 시장에서 약 15명이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부르자, 이에 시장의 군중들이 합세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일제 헌병들이 출동해 독립만세를 부르는 군중들을 제지하자 잠시 진정됐다.
그러나 오후 6시경 다시 수백명이 읍밖에 집합해 읍내로 진입을 시도하면서 또 한번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이 독립만세운동은 지금까지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영인면 수형자 명부를 보면 신운리 10명과 신화리 7명 합계 17인이 4월15일과 23일에 거쳐 온양 헌병분견소에서 태형 60도의 처벌을 받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초기 15명이 시장에서 독립만세를 주도했다는 주도 인사의 인원이 명시된 기록과 헌병이 출동해 진압했다는 기록도 있다.
김진태 공주정보고 교사의 논문에 의하면 “신화리 주민과 신운리 주민들이 중심이 돼 아산리 시장에 나아가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흔들면서 독립만세를 부른 독립운동으로 보여진다”고 기술돼 있다.
4월2∼3일에는 밤 8시 영인산에서 횃불을 올리는 것을 신호로 구읍 아산리에서 기독교인들이 주동을 해 수많은 군중들이 독립만세를 부르는 만세운동이 있었고, 상성리 뒷산 대흥당, 신운리 뒷산 형제봉, 성내리(안골) 뒷산에서 횃불만세운동이 있었다. 또한 해안 지역인 백석포 뒷산에서도 횃불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신창 3·1운동
신창 3?1운동은 4월2일에 있었다.
이 독립만세운동은 이덕균 등의 주도하에 읍내리 주민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이덕균 이외 박태화, 정윤흥, 김양순, 김금복 ,강순화, 손천일, 김원배, 승일상, 이상균, 김학삼, 김상준, 신흥남, 이창균, 강복개 등이 오후 8시경 읍내리 주민 약 2백명과 함께 학성산에 올라가 횃불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어 이덕균이 관청을 쳐부수자고 말을 하자, 박태화는 이덕균과 함께 군중들을 지휘해 전원이 하산했다. 먼저 면사무소에 도착해 정윤홍이 투석하여 문 2매를 부수고, 이어 헌병주재소로 가서 문 등의 유리를 투석해 깨트렸다. 또한 군중들은 신창 공립보통학교로 이동해 교정에서 독립만세를 부르자, 학교장인 종방교와 시비가 벌어졌다.
이어 박태화가 먼저 투석하자 군중들이 합세해 2백72매와 문 4매를 파괴했다.
이 과정에서 특히 강달성은 학성산 횃불만세운동에 참여하고 신창면사무소와 헌병 주재소 및 보통학교에서 군중의 선두에 서서 투석을 하면서 군중들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유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