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남씨가 분신전에 쓴 유서.
자살 아닌 타살로 내몰은 현실… 노동자 경악
분신까지의 과정
이해남씨가 자살가능성을 보인 것은 분신 며칠전이다.
민주노총 대구지역본부 관계자는 “이씨는 지난달 2일부터 다른 노조원들과 함께 세원정공 앞에서 천막농성을 벌여오다 최근 김주익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이 자살하자, 10월17일 유서와 비슷한 성격의 글을 인터넷 게시판에 올려 분신할 우려가 높다고 보고 만류했다”고 전했다.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김주익씨 사망 6일만인 지난달 23일 오후 8시55분께 대구시 달서구 신당동 자동차 부품 생산업체인 세원정공 공장 안 야적장에서 이해남씨는 일을 감행하고 만 것이다.
이 공장 직원 하성우(37)씨는 “야근을 하다 커피를 마시기 위해 현관으로 나오던 중 공장 내에 있는 야적장 부근에서 불길이 치솟아 소화기로 급히 끄고 보니 사람이어서 즉시 경찰에 신고하고 병원으로 옮겼다”고 말했다.
이날 이씨가 소속돼 있는 세원테크 노조원들은 자회사인 세원정공 공장 앞에서 천막농성을 벌이고 있었으나 이씨가 혼자서 공장 내에 들어가는 것을 미처 발견하지 못해 분신을 막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씨는 지난 3월18일 해고당하자 노동청에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냈고 농성 과정에 경찰측과 충돌한 것과 관련, 업무방해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위반 등의 혐의로 수배를 받아왔다.
세원테크 노조원들은 지난해 9월1일부터 이 회사의 파업 과정에서 머리에 심한 상처를 입은 뒤 지병인 심장병과 암 등이 악화돼 지난 8월26일 숨진 노조 간부 이현중(30)씨의 죽음과 관련, 회사측의 보상 등을 요구하며 세원정공 공장 앞에서 천막농성 중이었다.
죽음으로 내몰은 현실
세원테크는 아산시 배방면에 위치한 종업원 1백40여명 규모의 자동차부품 납품업체로 세원정공의 자회사다.
지난 2001년에 세원테크 노조를 결성하자, 이때부터 문제가 발생돼 지역신문에 단골메뉴로 등장해 왔었다. 회사측에 용역업체를 불러들여 노동자와 싸움이 일어나기도 했고 이 과정에서 이해남씨 등 4명의 간부가 구속 수감되기도 했다.
민노총 충남지역본부 관계자는 “세원테크가 지난해 5월부터 4개월간 노조원들이 장기파업을 벌이자 파업손실을 이유로 노조원들의 임금과 재산 등 11억원을 가압류 해 노사관계가 악화됐다”고 말했다.
노조가 생긴 이래 노조간부들은 구속 수감생활을 하거나 회사측이 낸 손해배상과 가압류에 시달려야 했다. 파업으로 생긴 손실을 손해배상하라는 것.
세원테크 노조는 노조를 탈퇴할 경우 손배, 가압류를 풀어주겠다며 노조탄압을 해왔고 실제로 노조를 탈퇴한 사람에게는 임금차등을 두었다고 주장했다.
아산의 세원테크는 대구에서 사망한 고 이현중씨가 세원테크 노사갈등이 가장 심했던 2001년부터 2002년까지 잠시 근무했던 곳이기도 하다.
이현중씨는 작년에 대구로 내려가 교섭결렬 후 파업기간 중 회사측과의 마찰로 두개골이 함몰되는 부상을 입고 입원도중 올해 8월26일 사망했다.
또한 이현중씨의 직접적인 사망원인이 됐다고 주장하는 바리케이트는 노조탄압의 수단으로 이용해 왔다는 것이 노조측의 주장. 회사측은 폭 8m, 높이 2m의 거대한 철문 바리케이트를 쳐왔다고 밝혔다. 노동자들은 이를 조합원과 비조합원들을 분리시켜려 했고 노조사무실 출입도 봉쇄했다고 주장했다.
이해남씨는 이같은 노조의 탄압과 손배, 가압류에 시달려 왔으면서도 노무현 정권이 들어선데 대해 큰 기대감을 가져왔다. 이해남씨의 옥중편지 내용을 보면 “노동자를 대변한 변호사였던만큼 노동현실을 개선해줄 것”을 기대한 것으로 보인다.
얼마나 많은 노동자가 죽어야…
그러나 현실이 여의치 않음을 느낀 이해남씨는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죽어야 이 나라의 노동정책이 바뀔 수 있겠습니까? 더 이상은 안됩니다. 제가 마지막 희생자가 돼야 합니다”라는 노무현 대통령 앞으로 쓴 편지를 남기고 분신을 감행했다.
이씨는 유서에서 “이 나라는 노동자들과 힘 없는 사람들이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버거운 게 현실인 것 같다”면서 “노동자들과 농민들, 영세상인들, 그리고 빈민들이 억압받고 핍박받으며 사는 나라가 대한민국 말고 또 어디 있느냐”고 항변했다.
이씨는 “대한민국 헌법 1조 ‘법은 모든 국민에게 평등하다’는 것은 정말로 웃기는 얘기”라면서 “돈 있고 빽 있는 X들은 수천억원을 해먹고도 검찰에 출두해 며칠간 콩밥 먹고 나오면 그만이고, 가난하고 힘 없는 노동자들과 농민들, 빈민들은 생존권 사수를 위해 투쟁했다는 이유로 몇 년씩 구속되고, 수배되고, 가정까지 파탄나는 것이 지금 이 나라의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대통령께서는 예전에 변호사 시절 우리 노동자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셨던 때도 있었지만 세원테크 사태와 관련해 몇 차례 청와대 신문고에 진정을 한 데 대해서는 여지껏 묵묵부답”이라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이씨는 “사측의 수많은 불법행위를 고발하고 진정했지만 회장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더라”면서 “그러나 저희들이 2년 전 노동조합을 만든 후 간부들 전체가 집행유예, 구속, 수배, 손배, 가압류 등의 피해를 당했다”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는 “이 나라의 법과 법을 집행하는 법원, 검찰, 경찰 등이 국민 앞에 당당하고 공정하게 법을 집행할 수 있는 나라가 되기를 바란다”면서 “노동자들과 대화는 외면한 채 오로지 노동자 죽이기로 일관하고 있는 악질 기업주들에 대해 반드시 정부 차원의 대응이 있어야 하며 이것이 이 나라의 경제를 살리는 길이란 것을 아셔야 한다”고 끝맺었다.
아산노동자들의 현실
비단 이해남씨 뿐 아니라 아산 노동자들의 현실도 마찬가지다.
현재 손해배상 및 가압류에 처한 사업장은 한 곳이지만 작년만 해도 3곳의 사업장의 노동자가 이런 아픔을 겪어야 했다. 음봉 S노조와 배방의 일진 노조의 경우 파업으로 사업장에 물의를 일으켰다며 회사측이 노동자에서 손해배상과 가압류를 신청했다.
일진노조의 경우 월급까지 가압류해 이곳의 비정규 노동자들이 회사를 떠나가거나 노조를 포기하는 사례가 속출하기도 했다.
세원테크도 그중 하나였다. 작년 파업으로 인해 이해남씨 등 노조간부와 노조원들에게 11억원의 손해배상과 가압류가 처해지기도 했으나 연말 노-사 타결이 돼 더 이상 이를 문제삼지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 월급을 차압당하거나 손해배상이 청구될 때의 기억은 잊어버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일진노조의 일용직 근무자 손모씨(47·천안시 거주)는 “비정규직으로 허리가 휘도록 특근에 야근까지 해봤자 80만원이 고작이다. 그런데 그 돈을 압류했다고 생각해 보라. 어떤 노동자가 홧병이 안나겠냐”며 “노동자들에게 무리하게 손해배상과 가압류를 청하는 업체들도 잘못이 크지만 정부정책이 노동자 편에 서있지 않다”고 말했다.
아산노동계의 또 하나의 아픈 현실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다.
지난 3월 현대자동차 하청업체 S업체는 월차를 냈다는 이유로 과장이 직원을 떠다민데 이어 입원한 병실까지 찾아가 칼로 부하직원을 찌른 사건도 있었다.
비정규직 근로자가 한시라도 자리를 비우면 일이 돌아가지 않기 때문에 비정규직은 아파도 휴가를 낼 수 없는 지경이다. 세원테크도 인대가 끊어져도 일을 하거나, 먹을 수도 없는 시커먼 소금을 작업장에 들여보내는 열악한 상황 속에서 작업을 해왔다는 것이 노조원들의 주장이다.
현대자동차들의 하청업체 일하는 노동자들은 급기야 현대자동차 하청지회를 출범, 비정규직의 설움을 벗고자 했지만, 불법 파업과 집회라는 이유로 지부장과 부지부장이 교대로 구치소를 들락날락해야 했다. 권모(28?여) 현자하청부지회장은 지난달 22일 아산경찰서 조사를 받고 현재 구치소로 수감 중으로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며 현재까지 단식농성 중에 있다.
민주노총 충남본부는 아산시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노동인구의 약 60%로 보고 있다. 기본급 및 근로시간 준수 등은 생각할 수도 없는 열악한 상황에서 그들은 생활하고 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민주노총에 따르면 지난달 29일 현재 노조에 대한 손배 및 가압류가 걸려있는 사업장은 전국 총 46곳으로 액수로는 1482억원.
해프닝? 혹은…
이해남씨의 분신 전후에 아산시는 재미있는 일이 일어났다. 지난달 21일(화) 경찰의 날 J모 과장이 세원테크 노-사의 원만한 합의를 이끌어 냈다며 대통령 표창을 받은 것이다. 이같은 기사가 지역신문을 통해 알려지기도 했다.
이를 본 세원노조측 L씨는 “노동자들은 사측으로 인해 많은 고통을 겪고 있는데 이를 가지고 대통령상까지 받았다니 말이 안된다”며 “사측의 말만 듣는 경찰이 노동자의 얘기도 들어 원만하게 이끌어 왔다면 상을 받아도 된다”고 말했다.
아산경찰서 경무계 관계자는 “여러가지 공적 중 이 부분도 포함이 돼 시상을 한 것이지 특별히 한 부분만 잘했다고 표창한 것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아산시 민주노총 관계자들과 민노당, 시민, 사회단체는 이를 사용주 편향적인 관공서의 잘못된 판단으로 보고 해명을 촉구할 것으로 보이고 있다.
또한 두산중공업 배달호, 한진중공업 김주익씨 등 잇따른 노동자의 참극을 보고만 있지 않을 기세다. 현재 아산지역 정당 및 민주인권사회단체는 이와 뜻을 같이 하며 이해남씨 사태 외 손해배상과 가압류, 비정규직철폐의 정부정책을 예의주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