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에는 몇몇 ‘삿갓바위’가 전해져 온다. 언제부터 전해졌는지, 그것들이 다 있는지 없는지는 정확히 모른다. 마을지명도 아니고보면 바위가 대충 어디에 있더라 하니, 주변에 눈에 띄지 않으면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 아니면 못 찾는지 알기가 쉽지 않다.
성거읍 천흥리 삿갓바위는 돌이 얹혀있는 것이 삿갓 같이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풍세면 두남리에는 삿갓봉이라 해서 두지골 북동쪽에 있는 산의 형태가 삿갓을 닮았다고 했다. 북면 운용리에는 독갓바위라 했다. 바위가 삿갓을 쓴 것 같이 생겼다 한다. 수신면 장산리에는 삿갓소가 있는데 삿갓둠벙이라고도 했다. 사갑들에 있는 소로, 삿갓처럼 생겼다 했다.
▲ 광덕산 등산로변에서 보이는 삿갓 형태의 바위.
‘삿갓’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김삿갓(1807~1863)의 본명은 병연(炳淵).
1811년 평안도 일대에서 홍경래가 주도한 농민전쟁이 일어났다. 이때 가산군수 정시는 항복하지 않고 거역하다가 칼을 맞아 죽었고, 선천부사 김익순은 재빨리 몸을 피했다. 그 뒤로도 어줍잖은 일을 많이 한 김익순은 모반대역죄로 참형을 당했다. 정시는 만고의 충신이 되었고, 김익순은 비열한 인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그의 집안은 폐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역적의 자손이나 죄는 당사자 김익순에게만 묻고 아들 손자들은 종이 되는 신세를 면했다. 집안 내력을 철저히 숨긴 덕에 병연은 열심히 공부했고, 고을에서 보는 향시에 나갔다. 시제는 다음과 같았다.
“가산군수 정시의 충절을 논하고 선천부사 김익순의 죄가 하늘에 닿는 것을 탄식한다.”
論鄭嘉山忠節死, 嘆金益淳罪通于天
김삿갓은 자신의 생각을 마음껏 드러내 써내려갔다. 그중 마지막 한 구절만 보면 이렇다.
임금을 잃은 이 날 또 어버이를 잃었으니
한 번만의 죽음은 가볍고 만 번 죽어 마땅하리
김삿갓은 장원급제를 했고 이 사실을 어머니에게 자랑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할아버지의 옛 일을 더 감출 수가 없었다. 일찍 결혼하고 자손까지 보았으나 마음을 잡지 못한 그. ‘하늘 보기 부끄럽다’ 해서 삿갓을 쓰고 전국을 방랑하게 된 연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