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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다시 산을 생각한다

산을 좋아하는 이유는 내가 산이 되기 때문 

등록일 2023년11월27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가로수의 잎이 순해졌다. 그 아래를 걷는 걸음도 순하다.

산으로 돌린 걸음은 어느덧 솔향이 가득 내린 오솔길에 들어섰다. 미소로 벌어진 코는 연신 향을 들이기에 바쁘다. 산모롱이를 돌아 참나무 우거진 곳으로 들어서자 두 팔이 절로 벌어진다. ‘꽃은 산의 뜻대로 기뻐하고 새는 숲의 넋처럼 노래한다’란 운초 김부용의 시가 작은 새의 지저귐처럼 절로 나온다. 산이 나를 반기는가, 내가 산을 반기는가. 

5월의 숲에서 윤기 자르르 도는 나뭇잎을 올려보다가 눈을 내렸을때 눈에 든 아기붓꽃, 그 여린 꽃을 보며 냈던 탄성이 기억에서 사라질 때쯤 성하(盛夏)의 산엔 더 샛노란 아기 원추리가 피었다. 걸음을 떼지 못하고 쪼그리고 앉아 눈을 맞췄다. 짙푸른 색으로 위협하던 여름 산도 어느새 간색을 입고 있다. 바람이 부는지 후드득후드득 상수리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겅중거리며 걷다가 쉬엄쉬엄 가자는 핑계로 초콜릿 하나 꺼내먹는 시간은 잎사귀 너른 갈참나무잎과 이야기하는 때다. 멀리 산자락에 걸린 하얀 구름도 본다. 그런 시간에 신경림 시인은 개개비, 휘파람새 노랫소리를 듣는단다. 
 


산에 대하여/ 신경림
              
산이라 해서 다 크고 높은 것은 아니다/ 다 험하고 가파른 것은 아니다/ 어떤 산은 크고 높은 산 아래/ 시시덕거리고 웃으며 나지막히 엎드려 있고/ 또 어떤 산은 험하고 가파른 산자락에서/ 슬그머니 빠져 동네까지 내려와/ 부러운 듯 사람 사는 꼴을 구경하고 섰다/ 그리고는 높은 산을 오르는 사람들에게/ 순하디 순한 길이 되어 주기도 하고/ 남의 눈을 꺼리는 젊은 쌍에게 짐즛/ 따뜻한 사랑의 숨을 자리가 되어 주기도 한다 

- 중략 -
 

사람이 다 크고 잘난 것만이 아니듯 다 외치며 우뚝 서 있는 것이 아니듯 산이라 해서 모두 크고 높은 것은 아니란다. 모두 흰구름을 겨드랑이에 끼고 어깨로 바람 맞받아치며 사는 것은 아니란다.

작은 나무 큰 나무, 작은 잎 큰 잎이 어우러지고, 굽은 나무 곧은 나무를 가리지 않고 새는 둥지를 튼다. 빽빽하게 채울 줄도 알고 때가 되면 버릴 줄도 알아 가을이면 헐거워지는 산, 어느 때든 찾아오면 수많은 이야기를 소리 없이 들려주는 산이다.  
 


젊은 날엔 산꼭대기에 올라 소리를 질렀다. 나만 실수하고 사는 듯, 나만 초라한 듯, 나만 꿈을 못 이룬 듯, 나만 든든한 배경이 없는 듯, 서럽고 부끄러워 도살장에 끌려가는 황소처럼 울었다.

이젠 직선으로 하늘을 향하던 몸이 늙은 산처럼 구부러진다. 자로 잰 듯 반듯해야 한다는 듯 위로만 솟는 대나무처럼, 또 나를 공격하면 가만 안 둔다는 듯 둥치에 손가락만큼 큰 가시를 덩어리로 달고 있는 쥐엄나무처럼 까칠한 마음에 ‘무엇이 중한디’란 말이 슬그머니 들어왔다.

가끔 곧추서려는 자존심을 새끼손가락을 스치고 가는 바람처럼 보낸다. 숟가락도 가벼운 것으로 옷도 가벼운 것으로 가방도 가벼운 것으로 지닌다. 벗기 좋게 내려놓기 좋게. 

인연이 오면 동행하고, 가겠다는 친구는 목례로 보낸다. 아름드리 느티나무도 아기 젓가락 같은 가지의 젓가락 나무도 세월이 가면 눕는다. 후박나무 넓고 두터운 잎도 싸리나무의 작고 여린 잎도 내린 후엔 다같이 흙이 된다고 알려주는 산이다.

작은 나무 큰 나무 어우러져 숲이 된다고 알려주는 산, 스승이면서 친구이고 나 같으면서 너 같아서 좋은 산이다. 눈을 감고 크게 숨을 들인다. 내 숨과 숲의 숨이 하나 되는 순간이다. 

함민복 시인은 ‘산’이란 짧은 시에서 삶에 지치면 먼발치로 당신을 바라보고 그래도 그리우면 당신 찾아가 품에 안긴다 했다. 그렇게 살다가 영, 당신을 볼 수 없게 되는 날 당신 품에 안겨 당신이 될 수도 있겠단다. 

그렇구나, 그렇게 나도 산이 되는구나, 산과 내가 하나라는 생각, 그리고 영영 하나가 되리라는 생각을 왜 못하고 살았을까. 그저 산이 좋아서 산을 좋아하는 줄 알았더니 나와 하나 될 것이기에 좋았구나.

깨달음이 늦어서 섭섭하기보다 깨달아서 좋은 시간이다.

다시 산이다.
 

김다원 리포터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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