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어린 시절 하얀 둥근 달을 보면 신비스러웠다. 궁금증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던 때였다.
“달이 없어졌다 생겨났다. 커졌다 작아졌다. 이태백이 놀던 달은 어떤 달인가. 이태백은 누구인가. 토끼가 떡방아를 찧는다니, 거기에 토끼가 어떻게 살지?”
오래 전 터키를 여행했었다. 터키는 최근에 튀르키예로 나라이름을 바꾸었다. 바뀐 이름을 사람들은 아직은 낯설게 느끼고 있다. 영어로 터키(Turkey)는 칠면조와 똑같다. 속어로는 ‘겁쟁이’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튀르키예(Turkiye)는 ‘용감한 민족’이란 정반대의 뜻이다.
튀르키예는 고대 4대문명 발상지 중의 한 곳이다. 티그리스 강의 발원지이다. 기원전 1800년경에서 1100년 사이에 강대국 이집트에 맞선 히타이트 제국이 바로 지금의 튀르키예다.
원형극장으로 이어지는 대리석 길에서인지, 셀수스 도서관 근처인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수많은 관광객들이 오갔다. 길가에 즐비하게 널려있는 석재 조각들이 쌓여있었다. 그 한쪽에는 여행에 지친 이들이 걸터앉아 쉬기도 하고 기대 서있기도 했다.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이국적인 사람들의 향연장이었다. 대부분 우리처럼 걷기에 힘이 부치는 사람도 있었지만 젊은이들도 삼삼오오 쉬면서 무언가를 각자의 언어로 얘기했다. 마치 방언을 말하는 모습이 연상되었다. 기독교의 역사가 깃든 이곳이 박해를 받아 그리스도인들이 지하 수백미터 아래로 숨어들어 살았던 지하도시 데린구유가 떠오른다. 종교의 자유화를 했지만 대부분이 이슬람교를 믿는다고 하니 좀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길가에 쉬고 있는 많은 사람 중에 옆모습에서부터 느껴지는 미모의 한 여인이 환하게 눈에 들어왔다. 금발의 웨이브 머릿결에 발그레하면서도 하얀 피부가 매력적이었다. 붉은 입술, 큰 눈망울에 짙은 눈썹이며, 클레오파트라 코 같은 여인이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미인을 지금까지 본 적 없다. 비너스가 이랬을까? 《아가서》에 나오는 술람미 여인이 이런 모습이었을까? 함께 사진이라도 찍어보고 싶었으나 용기를 내지 못하고 머리에 그려만 넣고 우리일행을 따라가야만 했다. 그때는 왜 그런 용기를 내지 못했을까. 아직도 참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춘향전》에 이 도령이 춘향을 ‘월궁의 항아(姮娥)’ 즉, 달나라의 선녀라고 했다. 항아는 누구인가? 서양의 신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신은 아프로디테, 바로 비너스이다. 그러면 동양 신화에 나오는 최고의 미녀는 바로 항아가 아닐까. 항아는 《산해경》 속에 등장하는 달의 여신이다. 튀르키예에서 만났던 미인이 항아를 닮았을까. 비너스를 닮았을까. 나의 상상력을 한없이 펼치게 한다. 항아는 어떻게 달의 여신이 되었을까.
동이계 종족의 영웅으로 활을 잘 쏘는 '예'라는 인간이 있었다. 예를 배신한 아내가 항아다. 어느 날 예가 서왕모라는 여신에게서 불사약을 얻어왔다. 욕심이 생긴 항아는 예가 외출한 틈을 타 불사약을 훔쳐먹었다. 그랬더니 몸이 둥둥 하늘로 떠올랐다. 항아는 승천하다가 자신이 남편을 배신했기에 하늘나라에 가면 신들이 별로 안 좋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을 배신했으니 스스로 떳떳하지 못하여 밤에만 다니는 달로 피신하여 ‘달의 여신’이 되었다. 최근에 중국에서 쏘아올린 달 탐사선의 이름도 ‘항아(창어嫦娥)’이다.
프랑스 학자 질베르 뒤랑(Gilbert Durand)은 비과학적이고 미신적인 황당무계하다고 여겼던 신화가 다시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신화의 귀환’이라고 했다.
근대에 이르러 신화와 함께 귀환한 것이 있다. 바로 상상력, 이미지, 스토리다. 오늘날 인문학의 화두이기도 하다. 이처럼 신화는 상상력과 이미지와 스토리의 원형이다. 큰 특징의 하나는 스핑크스, 세이렌, 메두사 등 반신반수의 모습을 서양 그리스신화에서는 신이나 인간보다 열등하고 사악한 존재로 묘사했다. 반면에 동양에서는 천인합일(天人合一) 사상 즉, 자연과 사람이 하나 되는 것이라고 했다.
상상력을 넓히려면 동양고전을 읽어야 한다고 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신화서 《산해경》이란다. 《산해경》은 한마디로 중국의 다양한 종족 및 지역문화의 총체이다. 기원전 3~4세기, 전국시대에 쓰였다. 지식층이 아닌 무당이나 방사(方士)들이 썼다. 제도권 밖의 기층문화(基層文化)를 담고 있어 더욱 고전으로의 가치가 높다 하겠다. 총 18권인데 산경, 해경, 황경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관된 스토리가 아니고 옴니버스 형식이라 읽기도 쉽다.
항아의 남편 예는 활을 잘 쏘는 사람으로 전해오는 일화가 있다.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해가 10개가 떨어져 농작물이 다 타 죽고 난리가 났다. 기우제를 지내도 소용이 없자 사람들은 예에게 활을 쏴 태양을 떨어뜨리게 했다. 예가 활을 쏘자 태양의 전령 삼족오가 떨어졌다. 예는 괴물도 퇴치하는 착한 인간이었는데 아내와 제자에게 배신당하고 불행해졌다.
예는 제자 중 한 명이 너무 똑똑해 그를 총애했다. 그런데 그는 가르침에 고마워하기는커녕 스승을 시기했다. 제자는 “스승만 없으면 내가 1인자가 될 텐데”라는 못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느 날 사냥에서 돌아오는 예를 복숭아나무 몽둥이로 뒤통수를 쳐 죽였다. 백성들은 예가 죽자 안타까워하며 성대하게 제사를 지내 주었고 예를 귀신의 우두머리로 섬겼다. 우두머리 신, 예는 무서울 게 없는데 딱 하나 무서워하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복숭아였다. 그래서 제사상에는 복숭아를 놓지 않는다. 복숭아가 있으면 귀신들이 무서워서 오지 못한다고. 무속인들이 귀신들린 사람을 고친다고 복숭아 가지로 때리는 것도 그 이유란다.
튀르키예에서 만났던 여인이 비너스를 닮았을까? 항아를 닮았을까? 아니면? 나도 상상력으로 이미지를 그리며 스토리를 써본다. 비너스나 항아는 실존하지 않으니 자못 궁금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