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서로 입을 쳐다보며 배꼽을 잡고 웃었다. 입 주변은 말할 것도 없고 얼굴 여기저기가 시커멓다. 뽕나무 가득 오디가 익었으니 가지를 잡고 정신없이 따먹었다. 얼굴과 옷에 묻는 것을 챙길 시간이 없다. 얼굴과 옷에 떨어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우리 어릴 적 이야기다.
청수동 우미린아파트 정문 옆에도 큰 뽕나무가 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뽕나무도 오디도 모른다. 애들뿐인가. 아이 엄마도 오디를 따먹는 날 보고 “그거 먹는 거예요?” 하며 신기한 듯 본다. “하나 먹어보세요.”
누구는 하나 맛보더니 더 먹어 보려고 가지를 잡고, 누구는 멀찌감치 서서 구경만 한다. 이럴 땐 유식한 척 해야 한다. “보라색 열매에 안토시아닌 성분이 많다. 비단실을 만드는 누에가 먹는 것이 이 나무의 잎이다. 뽕나무 잎과 가지엔 당뇨에 좋은 성분이 있다. 또 몸에 좋다는 상황버섯이 나는 나무다”라며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러나 젊은 사람들에게 더 솔깃한 이야기가 있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아느냐고 묻는다. 안다고 하면 이야기를 들을 귀가 있는 것이다. 오늘은 뽕나무와 관련된 이야기, 즉 영국의 국민작가 셰익스피어가 쓴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의 바탕이 된 『그리스 로마 신화』 중에 있는 이야기를 들어보자. ‘피라모스와 티스베’ 이야기다.
바빌로니아에 피라모스란 미남이 있었다. 또 으뜸가는 미녀 티스베도 있었다. 둘은 뜨겁게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선남선녀의 사랑에 무슨 문제가 있으랴.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두 사람의 집도 가깝지만, 집안끼리도 가까이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무슨 일인지 두 집안은 둘의 사랑을 허락하지 않았다.
만남이 쉽지 않은 둘은 두 집 사이에 있는 벽의 틈을 이용하여 사랑의 언어를 나누었다. 그러나 불타는 젊음이 대화만으로 되겠는가. 둘은 밤에 가족들 몰래 니노스의 묘(여왕의 남편 묘) 옆에 있는 나무 아래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흰 뽕나무다. 그 옆에는 또 물이 퐁퐁 솟는 샘이 있었다.
밤이 깊어지자, 티스베가 너울로 얼굴을 가리고는 뽕나무 밑에 앉아 기다렸다. 그때 암사자 한 마리가 그곳에 나타났다. 암사자는 갓 잡아먹은 짐승의 피를 입가에 잔뜩 묻힌 채 목이 말랐던지 샘을 찾아 그곳까지 왔다. 놀란 티스베는 너울이 떨어지는 것도 모른 채 동굴로 숨어들었고 너울을 본 사자는 피투성이 입으로 너울을 발기발기 찢어놓고 갔다.
조금 늦게 도착한 피라모스는 땅에 찍힌 사자의 발자국과 티스베의 너울을 보고는 낯 색을 잃었다. 한밤중에 티스베를 그 무서운 곳으로 불러내어 죽게 했다는 것에 자책하며 늘 지니고 다니던 칼로 자결한다. 잠시 후 티스베가 동굴에서 나와 나무 아래를 보니 사랑하는 남자가 죽어 있지 않은가. 아직도 따뜻한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울던 그녀도 사태를 짐작하고 그를 따라 죽는다. 그들의 피가 땅으로 스며들어 흰 뽕나무의 열매가 검붉어졌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두 집안은 이들을 묻으며 더 가까워졌단다.
뽕나무를 좋아하다 보니 할 말이 많다. 어린나무의 둥치는 누런색이며 매끈하다. 밝은 둥치와 가지 때문에 산과 들에서도 금방 눈에 띈다. 우리나라에서 뽕나무가 나오는 기록은 삼국시대로 올라간다. 고구려는 동명왕 백제는 온조왕 때 양잠을 장려한 기록이 나오고 조선시대는 태종 때 집마다 뽕나무를 나눠주고 양잠을 장려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뽕나무를 기르던 곳, 잠업을 관장하던 기관을 두었다. 그 흔적을 알 수 있는 지명이 ‘잠실’과 ‘잠원동’이다. 뽕나무 위에 올라가 뽕잎을 따는 장면의 옛 그림도 있다. 성경에는 세리인 삭개오가 예수를 보려고 뽕나무 위에 올라갔다가 예수의 눈에 띄어 예수가 그의 집에 머무는 이야기가 나온다.
뽕나무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다. 어린잎은 나물로 먹고 덕어서 차도 만든다. 잎이 세면 말려서 곡식 가루와 섞어 먹고, 열매인 오디로는 청이나 잼 혹은 술을 담근다. 당뇨에 좋다고 줄기는 잘라 말려서 달여 먹고 뿌리는 껍질을 벗겨 약으로 쓴다. 상백피다. 산뽕나무에서 자란 상황버섯은 각종 암에 귀한 약재로 쓴다. 100년 이상 된 뽕나무 뿌리에서 자라기 때문에 중국 진나라에서 상황버섯을 보면 제를 지냈다는 이야기도 있다.
뽕잎을 먹고 자라는 누에를 보는 것도 재미있다. 누에가 뽕잎을 먹고 고치가 되기까지는 30일 가량이다. 들깨 알보다 작은 누에가 다 자라면 만 배까지 커질 수도 있단다. 먹고 자기를 반복하는데 누에가 사각사각 뽕잎을 갉아 먹는 소리는 듣기가 좋다. 여름밤 풀잎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창호지 문을 사이에 두고 듣는 듯 엇박자의 소란한 리듬이 매력이다.
다 자란 누에는 고치를 만들고 번데기가 된다. 고치는 단 한 줄의 실에서 시작되는데 길이가 1000m~1500m까지라니 길기도 하다. 그 실로 짠 것이 비단이다. 중국의 나비 날개 같은 비단에 매혹된 유럽은 너도나도 비단을 찾았다. 중국에서 유럽으로 비단을 실어 나른 길이 비단 길이다. 산을 넘고 사막을 건너가는 그 비단길은 몇m나 될까.
번데기를 먹어본 이는 안다. 그 맛에 중독된다는 것을. 처음 시작은 초등학교 전이었다. 이웃집에 심부름하러 갔는데 마침 물레로 실을 잣고 있었다. 물에 둥둥 뜬 누에를 건져주니 얼결에 먹었다. 처음 입에 넣었을 때는 보드라웠고 톡톡 튀며 씹히는 맛은 고소했다. 그 후 종이컵에 든 번데기를 보면 얼른 사 먹고 싶다. 모습은 징그러울지 몰라도 짭조름한 번데기는 간식이 많지 않던 시기에 작은 고동과 함께 별미로 먹었다. 나에게 처음 번데기 맛을 준 그 물레 잣던 이웃집 여인은 어디 갔을까.
뽕나무의 오디를 보다가 번데기의 추억까지 더듬었다. 보라색 열매는 무조건 먹자. 블루베리, 버찌, 체리, 까마중, 오디까지 다 먹자. 안토시아닌이 많다지 않은가. 지금도 동네 어르신의 한마디가 생각난다. “애들아 많이 따 먹어라. 눈이 밝아질 테니” 나도 얼른 따먹어야겠다. 손과 입에 물이 든들 어떠랴. 눈이 좋아진단다. 좋아진 눈으로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다시 읽어야겠다. 아니다. 아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부터 읽어야겠다. 손으로는 오디를 더듬어 먹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