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너 닫기
뉴스등록
맨위로

성환을 지켜본… 천년의 눈 '봉선홍경사 사적비갈'

귀부의 어룡이 살아온 1000년의 세월, 묵묵히 천안역사를 지켜본 증인

등록일 2023년05월15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사라진다는 것은 인간감정의 입장에서 꽤나 ‘슬픈’ 일일 게다. 그것이 가족이든, 세월이든, 사랑이든 말이다. 만해 한용운은 그의 시에서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떠나는 슬픔을 감당할 수 없다면 만나는 기쁨을 갖지 말라는 조언처럼 들린다. 실제 아직 세상경험이 적은 젊은이들이 적지 않게 ‘만남’이나 ‘사랑’을 기피하고 있기도 하다. 한 번의 쓰라린 경험이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다>는 ‘트라우마’로 남는다. 도전과 용기가 떠난 자리에 채워지는 것은 절망이며 체념이다. 

사라지는 것이 그럴진대, 그렇다면 사라지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 그런 것이 있기는 있는 걸까. 천안에는 많은 전설과 유래가 전해온다. 부엉이바위도 있고, 술샘도 있고, 여우골도 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이제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상상 속 이야기’가 되었다. 
 
한번은 궁금하기도 하여 천안에서 가장 오래된 흔적을 찾아보았다. 동물이라야 기껏 100년이면 그 생명이 다하고, 식물이라면 안서동의 느티나무가 800년이 훌쩍 넘었어도 건재하다. 물론 바위나 산, 강 등은 수천, 수만년도 더 되었을 것이다. 더 나아가 땅덩어리는 지구의 생성부터 시작하니 수십억년은 되었을 것이다. 그래도 생명체의 형상이나마 갖고 있는 것들 중에서 뽑아보자니,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다. 바로 ‘귀부의 어룡’이다. 
 

▲ 천년의 세월동안 귀부의 어룡은 무엇을 쳐다보고 있었을까.


2021년을 살아가는 천안에는 ‘귀부의 어룡’이 올해로 딱 1000살이 되었다. 1021년에 지어진 천안 성환읍 봉선홍경사의 ‘비갈’로, 이는 홍경사가 창건되고 5년 뒤에 세워진 것이라지만 어림잡아 1000살의 어룡이 천안의 세월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천년은 영원(永遠)에 해당하는 시간이다.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신의 영역. 그래서 우리나라 전설에서 ‘천년의 여우’나 ‘천년의 구미호’가 종종 등장하는 이유다. 

김성열 전 천안향토문화연구회장이 ‘봉선홍경사 사적비갈’에 대해 쓴 글을 보면, 성환 소사평이라고도 하고 홍경원 들이라고도 불린 이곳에 국보 제7호(1962년)로 지정받은 비갈이 비각 안에 보존되고 있다. 
당시 성환과 평택을 오가는 드넓은 들녘은 인가도 없고 갈대만 우거져 도적들이 들끓었다. 고려 현종이 부왕 안종의 뜻을 헤아려 홍경사라는 사찰을 세운 뒤에야 도적떼가 사라졌다. 아버지 뜻을 받들었다 하여 ‘봉선(奉先)’을 단 『봉선 홍경사(弘慶寺)』는 이후 1176년 공주 천민 망이·망소이난때 모두 불타 없어지고, 절의 창건에 관한 기록을 담은 갈비만 남게 되었다고 한다.  
 


귀부의 어룡은 당대(고려조) 최고의 문장가인 최충(崔沖)이 지은 비문을, 최고의 문필가인 백현례(白玄禮)가 쓴 비문을 등에 업고 있다. 
갈비(碣碑)는 일반적인 석비보다 작은 것을 말한다. 보통 거북 받침돌을 쓰는데, 홍경사 사적갈비는 용의 머리에 물고기 지느러미 같은 날개를 머리 양쪽에 새겼다. 특히 비신을 받치는 귀부의 어룡이 머리를 오른쪽으로 돌리고 있는 점은 특이하다. 송강 정철의 넷째아들인 정홍명(1582~1650)은 그의 기암집에서 ‘귀수의 거북이’라 표현해놓기도 했다.
 

▲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린 어룡이 쳐다보고 있는 어룡리 들판.


그런데 우연일까, 필연일까. 어룡이 머리를 돌린 오른쪽에는 하필 ‘어룡리(魚龍里)’가 자리하고 있다. 여기서의 어룡은 실제 어룡(魚龍)과는 차이가 있다. 전해지기로는 이곳 마을의 지형이 물고기인 ‘어랭이’ 같이 생겨서 어랭이라 부르다 어룡이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같은 우연은 또한가지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궁극에는 필연으로 이끈다. 어룡리에는 고기가 살다가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고 해서 지어진 ‘용머리샘’이 전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어룡이 고개를 돌린 것에 대해 김성열 연구회장은 ‘비석의 방향이 성거산을 일직선으로 바라보고 있어 이를 피한 것이 아닐까’ 하고 추정한 바 있다. 나는 생각한다. 어룡이 보고 싶은 것이 혹 오른쪽 들녘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귀를 열어둘때 고개를 돌리기도 하는데 무언가 더 세상을 듣고싶어한 것은 아닐까. 어룡리와 용머리샘과는 어떤 연이 닿아있는 것은 아닐까.
무려 천년의 세월을 보고 들어온 귀부의 어룡. 그에게 그간의 역사를 채록할 수 있다면 얼마나 근사할까. 지금은 그저 논이 되어버린 소사평의 망망한 들녘을 바라보고 있자니 천년의 시공을 지나온 어룡처럼 잠시 역사를 헤아려보게 된다. 
 


봉선홍경사는 망이·망소이의 난때 불에 타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렸다. 
1176년(명종6년) 정월공주 명학소에서 망이·망소이가 무리를 모아 봉기하고 공주와 충주를 함락시켰다. 1177년 정월, 정부가 이들을 회유하며 진정되는 듯 하였으나 얼마 못가 망이·망소이 등은 재차 봉기했다. 3월에는 홍경원을 불태우고 개경까지 진격하려 했다. 그러나 정부의 토벌군에 의해 망이·망소이 등은 청주옥에 갇히고 1년 반 동안의 반란은 모두 끝이 났다.  

정유재란(1957년)때는 이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선조는 명나라 군사 총지휘관인 양호에게 일본군의 한강 이북침입을 저지해달라 요청했다. 9월3일 양호는 군사 8천을 거느리고 남진했고, 뒤이어 증원군 2천이 따라붙었다. 9월 초순 조선군과 명나라 연합군은 직산에서 일본군을 대파했다. 일본군은 이후 서울침략을 꾀하지 못했으며, 이 소사(素沙)전투는 평양성전투, 행주산성전투와 함께 ‘임진왜란 육전3대전’이라 불리워지게 됐다. 
임진왜란때 조선에 파병나온 명의 군사들은 온갖 횡포를 부렸지만 계금장군이나, 양호처럼 훌륭한 인물도 있었다. 양호는 명나라 관리의 무고행위로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1597년 12월 24일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서 그에 대해 언급됐다. <명나라 장수 경리양호는 붉은 비단 한 필을 보내면서 ‘배에 이 붉은 비단을 걸어주고 싶으나 멀리서 할 수 없다’고 했다.> 이순신 장군을 알아본 장수였던 것이다. 

조선중기 문신이자 문학가인 서포 김만중(1637~1692)의 ‘서포집’에 시 한 편이 눈에 띈다. 
 

큰 들이 백리에 넓게 펼쳐 있으니
해와 달이 그 가운데 지는구나.
나의 행로는 남쪽으로부터 와서  
홀연히 동서를 헤매노라.
일찍이 들으니 한나라 뛰어난 장수가
여기에서 큰 공을 세웠다네.
뛰어난 계책은 볼 수 없으나 
갑옷에 휘감던 바람 여전히 불어오네.

 

그의 ‘소사(素沙)’라는 작품이다. 아마도 뛰어난 장수로 언급된 인물이 ‘양호’ 아니었을까. 
아, 양호도 양호이건만, 서포도 이곳에 왔었구나. 김만중은 예학의 대가인 김장생의 증손자로, 1665년(현종6년) 문과에 장원급제한 인물이다. 무엇보다 어머니의 시름을 위로하기 위해 지었다는 ‘구운몽’과, 숙종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썼다는 ‘사씨남정기’란 소설을 지어 우리나라 문학사를 빛낸 인물이다. 특히 국어책에 수록되었던 ‘구운몽’은 조선시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소설로, 성진과 팔선녀 아홉사람이 꾼 꿈을 통해 인생무상, 일장춘몽을 나타낸다. 

1890년대 청일전쟁 즈음에는 이곳이 무척 시끄러웠다. 청국군과 일본군이 7월 하순 성환 일대에서 전투를 벌였기 때문이다. 어룡의 뒤쪽에서는 월봉산전투가 벌어졌고, 벌판은 청나라군이 망한 곳이라 하여 ‘청망이들’로 불려오고 있다. 평택 소사벌과 성환 홍경평 일대에서의 싸움은 일본군의 압승으로 끝났고, 이 성환전투에서 양측의 군사 수백명이 죽음에 이르렀다. 
 

▲ 올해 천안시는 홍경사 건립 1000년을 맞아 이곳 대홍리 주민들과 함께 절터를 유채꽃밭으로 조성했다.


작금에 이르러 귀부의 어룡이 1000살을 맞아 기억에 남을 만한 생일상을 받았다. 사람처럼 소고기미역국을 대접받거나 생일케익을 받은 것이 아니다. ‘사촌보다 이웃이 낫다’고, 이웃주민들이 그보다 훨씬 인상깊은 ‘8000㎡의 유채꽃밭’을 통째로 안긴 것이다. 

홍경사 사적갈비에 대해 권집(1666~1704)은 그의 시에서 <수천년동안 비바람에도 부서지지 않는 것을 보니 귀신이 예부터 서로 지켜왔다>고 했다. 그러나 이 말은 정정해야 한다. 귀부의 어룡이 있으므로, 굳이 귀신이 지킬 필요가 없는 것이다. 
천년간 어룡이 있는 이 길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났을 것인가. 어룡이 있는 직산현은 호서지방으로 들어가는 첫머리로, 한때는 ‘호서계수아문’이 세워져 있었다. 온궁행차하는 임금부터 시작해 수많은 사건과 사고가 있었을 것이며, 셀 수도 없는 계절을 보내며 또한 얼마나 많은 자연재해를 만나 백성들의 눈물을 보았겠는가. 

어룡의 눈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세월을 피했으면 좀 더 쉬웠을 것을. 부리부리한 눈이 그러지 아니하였을 거라 짐작하게 한다. 이제 천년이 지났으니, 다시 천년이 지나면 이곳에 사는 주민들이 다시금 향기 그윽한 유채꽃밭 가득 들이밀어 주시기를, 그리고 누군가는 천년의 세월을 함께 회상해 보시기를…. 
 

김학수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관련뉴스 - 관련뉴스가 없습니다.
유료기사 결제하기 무통장 입금자명 입금예정일자
입금할 금액은 입니다. (입금하실 입금자명 + 입금예정일자를 입력하세요)

가장 많이 본 뉴스

종합 뉴스 라이프 우리동네 향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