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절정이다. 꽃들은 절정이 언제일까. 내 방식으로 해석해보면 꽃이 봉오리에서 막 벌어지는 순간이 아닐까. 그게 어디 꽃뿐이랴. 봄의 절정을 넘어서면 색색의 꽃을 피워 달았던 나무들은 일제히 초록 일색으로 그늘을 드리운다. 잎들이 절정으로 가는 시간이다.
상쾌한 아침 산책을 나서면 연초록의 반란은 꽃에 비할 바가 아니다. 꽃이 그러하듯 나뭇잎의 모양도 다양하다. 어느 나무를 보아도 고향 친구를 만난 듯 반갑고 정겹기만 하다. 나무들이 펼쳐 보이는 초록은 팍팍하기만 한 일상에서 지친 마음을 보듬어 준다. 가지마다 수천수만의 잎을 가득 달고 짙은 녹음을 드리운 나무를 보면 가장 믿음직스럽고 힘이 센 존재가 아닐까 생각도 해본다.
▲ 도솔공원의 대왕참나무.
오늘 아침은 일기예보에도 없던 보슬비가 내렸다. 산책은 짧게 예정하고 도솔공원으로 향했다. 보슬비에 몸을 맡기고 여유도 부려본다. 공원 산책로 양쪽에 일렬로 큰 키 나무들이 열병식이라도 하는 듯했다. 나뭇잎에는 방울방울 옥구슬이 맺혀있다. 이상기후로 날씨의 빠름이라고 하지만 다른 나무들은 어느새 짙은 녹색으로 짙어지고 있다. 그런데 한 종류는 이제 막 피어나는 잎의 색깔도 모양도 유별났다. 유난히 반짝이는 연초록의 잎은 어린 아이의 살결 같았다. 활엽수의 움푹움푹 파인 모양은 마치 톱니바퀴 같았다.
바람이 길바닥의 꽃잎들을 몰고 갔다. 뒹구는 꽃잎 사이로 누런 가랑잎이 끌려가지 않으려는 듯 뒷걸음질하며 바람에 밀려갔다. 낙화하는 봄날에 웬 낙엽이 날리는가? 엊그제까지 떨어질 것 같지 않던 잎들이 우수수 내려앉았다. 얼른 꽃잎 사이의 낙엽을 주워들었다. 왕(王)자가 그려져 있다. 어떤 연유로 가을 겨울이 지나고 이 봄에 그것도 싹눈이 트고 난 이제야 떨어진단 말인가.
언젠가 아파트단지를 산책하던 초겨울 날, 황갈색 단풍이 든 나무를 신기하게 바라보았었다. 주변 나무들은 상록수를 빼고 다 앙상한데 이 나무만 홀로 온전히 마른 잎을 달고 있었다. 하늘로 곧게 뻗은 줄기의 수피는 진회색으로 긴 홈들이 있고 단단해 보였다. 잎 사이엔 작은 가지 끝마다 새순이 수줍은 듯 숨어 있었다. 잎자루가 씨눈을 감싸고 있는 모양이었다.
한참을 보노라니 어머니 생각이 왈칵 가슴에서 북받쳐 올라왔다. 입을 것 먹을 것 변변찮던 시절에 어머니의 모성애가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다. 우리 칠남매는 그런 어머니의 사랑을 알기나 했을까. 그때는 몰랐었다.
왜 대왕참나무는 묵은 잎을 매달고 묵묵히 겨울을 견디는 걸까. 모성애가 강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새순의 추위를 조금이라도 막아주려고 겨우내 가랑잎으로 감싼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의 관점으로는 칼바람 속에서 단단히 잎을 매달고 있는 것이 어미 나무가 새끼를 보호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으로 보였다.
그렇게 엄동설한과 세찬 북풍을 견디고 따스한 봄볕이 내리쬐면 새순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새순이 올라오면서 마른 잎의 떨켜를 밀어내면 하나둘 어린순에서 떠난다. 우리가 어머니의 둥지를 떠나던 날의 불안한 마음이 이들에게도 있었을까.
대왕참나무는 이곳 천안으로 온 후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이미 90년이 다 되었다고 한다. 그 사연 또한 각별하다.
▲ 손기정기념관 내 대왕참나무.
1936년 8월, 베를린 올림픽에서 일장기를 달고 마라톤 우승시상대에 오른 대한제국의 손기정 선수가 월계관을 쓰고 금메달을 받았다. 당시 독일에서는 월계수를 구할 수 없어 대왕참나무로 월계관을 대신했다고 했다. 부상은 다름 아닌 대왕참나무 묘목이었다고 했다. 손 선수는 이 묘목 화분으로 가슴에 주홍글씨 같았던 일장기를 가릴 수 있었다. 자신의 모교인 서울역 뒤 만리재 언덕위에 있던 양정고등학교 교정에 심었다. 지금은 ‘서울시 기념물 제5호’로 지정되어 ‘월계관수’로 불리고 있다. 거목으로 자라서 푸른 기상을 떨치며 손기정기념관 앞에 우뚝 서 있다. 이렇게 우리나라에 들어온 대왕참나무는 1980년 이후 조림수, 조경수, 가로수 용도로 널리 보급되었다.
▲ 대왕참나무 가랑잎.
대왕참나무는 미국이 원산지인 참나무과 낙엽교목이다. 줄기는 진회색으로 곧게 자란다. 최대 30m까지 자라는데 잎은 가장자리가 7개 정도 깊게 파여 있는 것이 마치 왕(王)자와 흡사하다. 꽃은 암수 한 그루로 4~5월에 아래로 늘어진 꽃줄기에 황록색으로 피는데 꽃잎이 없어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열매는 우리나라 도토리보다 작고 납작하다.
현관 옆에도 대왕참나무 몇 그루가 옹기종기 서 있다. 이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잎이 유난히 반짝인다. 연녹색이 상큼하다. 나는 이때가 대왕참나무의 절정이라고 우겨본다. 나무의 표면을 쓰다듬으며 생각해 본다.
나무 하나를 알아가는 일이 결코 사람을 알아가는 일에 못지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이테를 제 몸 속에 깊숙이 숨기고 해마다 새잎을 내고 열매를 맺고, 가을이면 곱게 물들 줄 아는 나무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대왕참나무를 가만히 쓰다듬어 본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대왕참나무 어린잎 사이로 맑은 조각구름이 떠 있다. 하늘나라 어디엔가 있을 두 사람을 생각한다. 애지중지 우리를 감싸 안아 길러주신 어머니와 태극기를 가슴에 달지 못하고 금메달 시상대에 올라 부상으로 받은 대왕참나무 화분으로 일장기를 가린 서러움을 간직하고 살다 가신 손기정 선수를 불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