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절모를 쓰고 하얀 두루마기를 입은 젊은 남자가 서둘러 황톳길을 간다. 옷차림으로 보아 지식인이거나 양반인 그는 안 보고 싶다는 듯 왼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 얼굴엔 괴로움이 가득하다. 이상화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신학철 화가가 그렸다.
하늘과 맞닿은 평야의 보리는 간밤에 자정 넘어 내린 비로 삼단 같은 머리를 하고 있다. 도랑을 가득 채운 물은 무심하게 흘러간다.
봄을 맞아 풍요로운 그 땅에선 제복을 입은 네 명의 남자에 둘러싸여 농민이 폭행당하고 있다.
네가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고개 돌린 일이 한두 번인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손자가 광주시민 앞에 무릎을 꿇고 할아버지가 광주시민을 무참하게 죽인 일을 사죄했다는 기사가 떴다. 무고한 시민을 죽인 본인도 사과도 하지 않고 죽었다. 다른 가족도 진실을 말하지 않고 산다.
나도 그 때 외면했다. 모든 보도는 통제되었다. 두렵고 무거운 바람만 불던 그 때, 아무도 입을 열지 말고 눈도 돌리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다.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갈 수 있으니 자기 할 일만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나는 공무원이었다. 내 밥그릇은 그들의 손에 있었다.
우리들은 얼마나 더 많은 인생길을 걸어야 참다운 사람이 될까?/
흰 비둘기는 얼마나 더 바다를 날아야 모래밭에서 편안히 잠들 수 있을까?/
전쟁의 포화가 얼마나 더 휩쓸고 지나야 이 땅에 평화가 찾아올까?/
친구여, 그 대답은 바람 속에 흩어져 날려, 바람만이 알고 있지.
밥 딜런의 ‘바람만이 아는 대답’이 비틀어진 입에서 나올 듯하다.
여전히 이곳저곳에 불안한 소식이 온다.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 명예살인이란 이름으로 가족에게 살해당하는 아랍의 여자들, 사랑이란 이름으로 자유를 빼앗기고 몸을 빼앗기고 봄조차 빼앗겨 울부짖는 데이트 폭력에 노출된 여자들, 부모와 친구에게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들,
우리는 너는 나는 이상화 시인의 시에서처럼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외면하고 가는 것은 아닐까?
그림 속의 남자얼굴을 정면으로 돌려놓고 싶다. 괴로움에 일그러진 표정을 조용히 펴주고 싶다. 조그맣게 밥 딜런의 노래를 마저 부른다.
얼마나 더 많이 고개를 들어 허공을 올려다봐야 하늘을 볼 수 있을까?/
얼마나 더 많은 세월을 살아야 다른 사람들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