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보면 아련한 연녹색인데 가까이서 보면 보슬보슬 노란 털이 달린 꽃을 달고 있다. 다른 나무들이 아직 기지개를 켜기 전의 나무는 하늘에 있는 줄기 끝까지 물을 끌어 봄이 온 것을 먼저 알린다. 버드나무다.
천안의 시수(市樹)이기도 하고 능소의 사랑이야기가 있어서인지 천안삼거리 공원엔 버드나무가 많다.
삼거리뿐인가 천안 여기저기에서 버드나무를 만날 수 있다. 이른 아침 안서동 천호지엔 잎을 막 틔운 버들이 물안개에 싸여 아련한 연두색 구름을 만든다. 청수동 호수공원에 가면 바람에 빗기는 버드나무 가지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한 폭의 그림을 만드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청수동 벽산아파트 바로 남쪽에도 버드나무가 무리지어 있다. 수고가 10여 미터고 둥치 둘레가 4미터인 왕버들이다. 10본은 1982년 천안시 보호목으로 지정되었다.
고목에 초록색 잎이 돋아나면 봄볕이 하르르 내려 뜰을 초록으로 만들고, 가을이면 나무 남쪽으로 벼가 노랗게 익어간다. 석양을 잠시 머금다 내려놓는 고목은 마을의 사계절 풍경을 멋지게 그려낸다.
거목인 왕버들에 사연이 없을까. 더 알고 싶어서 동네를 기웃거리다가 여러 해 전에 이장을 지냈다는 황의성(82)씨를 만났다. 청수동 남부대로에 접한 우리병원 뒤쪽에 있는 그의 집 마당에선 허리 굽은 아낙들이 참깨를 씻어 널고 있었다.
정오가 바로 지난 후인데도 마당엔 그림자가 지고 있다. 바로 앞에 들어선 건물과 옆엔 들어선 큰 마트 때문이다. 현관에 들어서자 농사짓다가 경운기에 다친 다리가 여러 해가 지나도 낫지 않는다며 90수의 주인장이 엉거주춤하고 맞는다.
동네 옛 이름이 ‘거재’라 했다. 동네가 크기도 했지만, 언덕이 있어 그 언덕을 넘어 천안 중앙시장에 다녔단다.
청년시절 모내기철에 버드나무가지 몇을 꺾어 논둑을 정비하다가 마을 어른에게 크게 꾸중을 들었단다. 정월이면 버드나무를 따라 돌면서 풍물을 울려 마을의 안녕을 빌었고, 추석이면 동네사람들이 나무 아래서 달맞이하며 놀았다고 회상하는 그의 얼굴에 잠시 홍조가 번졌다가 사라졌다.
그 아내가 거든다. 버드나무에서 아이들은 그네를 뛰고 아낙들은 나물을 다듬으며 달빛 아래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무가 멋지다고 젊은이들이 와서 결혼사진을 찍기도 했던 나무 아래엔 온 동네사람이 다 길어다 마시고 건강하게 살았다 해서 ‘장사 우물’이라 불렀다던 우물이 있다고 했다.
그 왕버들 북쪽 몇 미터 위에 거대한 성처럼 아파트가 들어섰다. 몇 그루는 나무뿌리 끝에도 건물이 섰다. 다음번 도시개발지역으로 들어간 곳이라 개발업자들이 나무 아래를 들락거린다.
도시가 커지면서 옛 정취가 사라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왕버들을 살린 공원을 상상한다.
맑은 물이 항상 넘치는 장수 우물과 그 우물 위에 초록색 버드나무 줄기가 바람에 날리는 너른 공원에서 아이들이 공을 차며 내는 높은 소리가 하늘로 오르는 것을 상상한다.
버드나무 줄기를 사이에 두고 오가는 연인들의 은밀한 미소를 상상한다. 풀밭에 자리를 깔고 누워 구름이 떠가는 것을 보다 스르르 잠이 드는 아이 아빠의 고단한 얼굴에 돋는 평안도 보고 싶다. 미래 청수동 왕버들 공원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