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확 잡아놨어요. 처음부터”
결혼 초 그이가 작은형님에게 그리 말했단다.
시아주버님 장례식장에서 형님의 말을 듣는 순간 “당신 정말 그랬어? 하늘에서 빨리 내려와 확인하게!” 라 말하고 싶었다.
그 밤, 여러 생각이 들었지만, 그의 말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결혼 초에 몇 번 기싸움을 하다가 남편의 성격을 안 후 적당한 선을 그으며 평화를 유지했으니까.
아니다. 전적인 양보였다. 시집식구들에게 무리하게 돈이 가도 눈을 감았고, 남편의 승진을 위해 내 승진도 포기했다. 시집식구의 대소사를 늘 우선으로 했다. 아들 결혼 때도 집으로 초대해 잔치하느라 정작 결혼식장엔 지친 얼굴로 섰다.
민중미술가 신학철의 그림을 보고 있다. 청보리 일렁이는 보리밭 사이를 분홍치마를 거머잡은 처녀가 도망치고 있다. 얼굴엔 이미 상처가 있고 치맛말기의 하얀 끈은 바람에 펄럭거린다. 그 뒤에서 말을 탄 남자가 쫓아온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여자의 몸은 휘청거린다. 그러나 멈출 마음은 없다.
“잡혀 죽어도 너는 싫어!” 온몸으로 항거하며 발을 들었다. 시대가 원하지 않는 일에 복종하라 하는 때도 있었고 원하지 않아도 살아내야 하는 때도 있었다.
삶에서 도망치고 싶은 적도 많았다. 꼰대같은 직장상사, 한계를 벗어난 고된 일, 원치 않는 결혼의 압박, 지겨운 공부, 치유되지 않는 고질병, 독박육아, 일어설 수 없을 정도의 경제적 고난, 가족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라는 무게, 무엇을 이루기에 늘 부족한 시간, 불안, 가정폭력이나 학교 폭력. 그리고 사랑이란 가명을 쓴 데이트 폭력까지 우리는 도망치고 싶고 도망쳐야 하는 순간이 있다. 목숨까지 위협하는 순간이 있다.
그런데 자연은 인간의 상황과 무관한 채 제 할 일을 한다. 막 익어가는 보리는 바람에 몸을 싣는다. 쓰러질 듯 휘청거리며 발을 떼는 여자의 옆엔 하얀 꽃이 하늘하늘 피어있다. ‘사람도 자연이다’라는 말에서 힘을 얻으라는 말로도 들린다.
풀이 바람에 눕고 질경이가 발에 밟혀도 다시 돋아나듯 사람의 삶에도 절망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그림 속의 여자가 말을 탄 장정에게 쫓기고 있지만, 마음을 빼앗기진 않았다고 말하는 듯하다. 마음이 살아있고 기다리는 봄이 있는 한 꽃은 피지 않겠느냐고 화가는 말하고 싶은가. ‘나에게는 아직도 봄은 오지 않았네’란 제목을 다시 읽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