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 밀러의 「폭력의 기억,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어린 시절의 체벌과 학대가 이후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다루고 있다. 그녀는 우울증을 비롯한 다른 정신질환의 원인이 어린시절에 부모에게 받은 체벌, 무시, 냉대, 굴욕, 학대와 같은 경험에 있다고 주장한다.
“아이는 부모에게 사랑받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부모에게 애정, 관심, 보호, 친절, 보살핌을 받아야 하고, 부모가 늘 자기와 의사소통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살아가는데 필요한 이런 선물을 받은 몸에는 ‘좋은 기억’이 저장되어 있습니다. 사랑받고 자란 어른은 훗날 자녀에게 그와 똑같은 사랑을 베풀 수 있습니다.”
부모에게 사랑을 받지 못한 아이는 어른이 된 이후에도 부모나 부모같은 존재에게 그같은 사랑을 기대하고 의존하나 쉽지는 않다. 그렇다고 포기가 안된다. 나이먹을수록 더 집착하게 된다. 결국 자기 아이나 손자들에게까지 전가될 뿐이다.
만약 현명한 자라면 스스로를 통해 극복이 가능하다.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는 것. 부모나 남들이 베풀어주지 않았던 관심과 사랑은 객체화된 ‘자기 스스로’를 통해 채울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보통의 사람들은 ‘악수’를 둔다. 부모나 남들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생각되면 스스로도 자기를 버리게 된다.
‘나는 하등 쓸모없는 놈이야. 이 세상에 필요없는...’.
그같은 자조가 스스로를 구렁텅이로 몰아넣는다. 원인은 다른 누군가로 시작되지만, 결국 스스로 결정타를 날림으로써 불행이라는 파국을 맞게 되는 것이다.
53쪽~
「기억에 대한 배반- 버지니아 울프」를 이야기해보자.
버지니아 울프와 그녀의 언니 바네사는 어린시절에 두 이복형제들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버지니아 울프는 24권에 달하는 일기에서 그 끔찍했던 시절에 대해 되풀이해서 언급했다고 한다. 그 시기에 그녀는 자기가 어떤 곤경에 처해있는지 부모에게 털어놓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부모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평생 우울증에 시달리면서도 버지니아 울프에게는 문학작품에 몰두할 힘이 있었다. 문학을 통해 자기자신을 표현하고 궁극적으로는 어린시절에 입은 끔찍한 정신적 외상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하지만 1941년, 우울증이 그녀를 무너뜨렸고 버지니아 울프는 강물에 몸을 던졌다.
그녀에 대한 연구논문에서 루이스 드살보는 이렇게 말했다.
“버지니아 울프는 인간의 행동을 어린시절에 겪은 체험의 논리적 결과로 간주했어요. 그런데 프로이트의 저서를 읽은 뒤로는 그의 이론에 기대어 인간의 행동이 충동과 상상, 허황된 망상의 결과로 보려 노력했지요. 프로이트의 저서가 버지니아 울프를 철저히 혼란에 빠뜨리고 만 것입니다.”
불행이 피어올랐다. 프로이트의 이론을 받아들인 그녀는 과거를 부정하기 위해 자신의 기억을 희생시켰다. 사실을 받아들이기 보단 회피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어린시절에 겪은 끔찍한 일에 대해 감정을 나눌 수 있는 누군가가 그녀의 곁에 있었다면 자살을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회는 어떠한가. 1987년 언론인 니콜라우스 프랑크는 ‘슈테른’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자기 어버지의 폭력을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했을 때 사람들은 그에게 엄청난 비난을 퍼부었다. 그의 아버지는 2차대전중에 크라카우에서 관구지도자로 지내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안긴 인물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의 아버지가 가장 잘못한 일은 그같은 아들을 낳은 것이라고 했다.
폭력이 나를 파괴할 수 있는가, 폭력을 핑계로 내 스스로 무너지는 것일까. 대중의 시선이 나를 억압할 수 있을까, 내가 나를 속박시키는 힘이 더 크지는 않을까...
절망하고 포기하기 보다는 주어진 삶 속에서 끊임없이 의심하고 한발자국 한발자국 더 나아가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삶은 결국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이다. 다만 선택이 긍정적으로 향할 수 있도록 할 수만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