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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낙호 수필 '배흘림기둥에 반하다'

천안·수필가

등록일 2023년02월04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비온 뒤 아침은 청량했다. 간밤에 내린 비가 말끔히 청소한 하늘은 구름카펫을 펼쳐놓았다.

바람도 시원했다. 팬데믹 유행으로 닫혔던 문들이 열렸다. 문학기행의 문도 열렸다. 코로나19 속에 가입한 문학회를 따라 늦은 봄 기행을 나섰다. 당일 코스로 충남 예산의 유적지를 찾아가는 일정이었다. 먼저 덕숭산 수덕사를 찾았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일주문을 지나 걸어가는 길가에 수국이 푸른빛을 발하며 싱그럽게 피어있었다.
 
여러 번 찾아가도 설레는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 사찰이다. 우리나라의 현존하는 사찰 중에 오래된 국보급 목조건축물로 유명하다. 신라 후기와 고려 초기의 목조 건축물 형태를 보존하고 있다. 안동의 봉정사 극락전,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영천 은해사 거조암의 영산전 등과 함께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곳이다. 
 
대웅전 내에서는 법회가 열리고 있었다. 한옆에서 내부를 들여다보려고 계단을 오르는데 동행하신 선생님께서 모서리 기둥을 만지며 “배흘림기둥이다” 하셨다. 오랜 세월 세파에 시달린 노파의 손등처럼 거칠다. ‘배흘림기둥’하면 생각나는 게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고 최순우 선생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라는 명수필이다.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에 남아있는 목조 건축의 진수를 압축해 놓은 짧은 글이다. 건축 전문가이거나 혹은 아니더라도 읽어보면 다 매혹되고 말 것이다.
 
부석사 무량수전만큼이나 애착이 가는 곳을 더 꼽으라면 나는 수덕사 대웅전을 주저 없이 말한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은 안동 봉정사 극락전이라고 하지만 기록상 가장 오래된 건축물로는 국보 제49호로 지정된 수덕사 대웅전이라고 한다. 부석사 무량수전과 건물 구조는 다르지만 천년 고찰의 아름다움을 꼽는다면 수덕사 대웅전을 빼놓을 수가 없다.
 
“아, 아름다운 배흘림기둥!” 살포시 감싸 안아본다. 울퉁불퉁하고 노인의 살가죽처럼 패이고 갈라져 있다. 긴 세월의 풍상을 묵묵히 견디며 꿋꿋이 서있는 모습은 대웅전 안에 모셔진 부처님의 미소를 닮았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기둥은 무슨 나무일지? 나무에 조예가 부족한 나로서는 가늠이 되지 않았다. 알아보았더니 당시는 싸리나무가 사찰 기둥으로 많이 쓰였다고 한다. 그런데 기둥목으로 쓸 만한 큰 싸리나무가 과연 얼마나 있었을까 싶다. 수덕사 대웅전, 부석사 무량수전 기둥은 싸리나무가 아닌 느티나무가 쓰였다고 한다.
 
대웅전 앞마당에는 300년 된 느티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느티나무도, 주목이 그렇듯 살아서 천 년, 죽어서 천 년을 산다고 했다. 대웅전 배흘림기둥이 느티나무인 게 입증하고 있지 않은가. 
 
배흘림기둥은 기둥의 아래위 부분을 가운데 부분보다 가늘게 하여 곡선 체감으로 시각적인 안정을 준다. 간장이나 된장 항아리(도아지)처럼 배가 나온 형태이다. 고대 로마의 신전에서 사용된 건축기법이기도 하다. 그들은 이를 ‘엔타시스’라고 불렀다. 
 
배흘림기둥은 주심포기둥이나 다포기둥으로 세운다. 주심포는 공포가 기둥에만 있고 다포는 공포가 여러 개로 늘어서 있다. 어느 식이든 지붕의 하중을 기둥에 골고루 전달하기 위함이다. 주심포는 주로 고려 전기의 양식이고 다포는 고려 후기에 원나라의 영향을 받아 등장한 공법이다. 배흘림기둥은 맞배지붕에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5칸짜리 수덕사 대웅전을 비롯해 다른 목조 사찰은 거의 맞배지붕으로 구성되어 멋을 더해주고 있다. 
 
고려시대의 법식을 잘 보여주는 부석사 무량수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로 대담하게 기둥 사이가 넓다. 높이도 당당하여 안정감이 있다. 무량수전만은 배흘림기둥이 받혀주는 팔작지붕의 아름다운 곡선이다. 물매는 완만하다. 처마의 아름다운 곡선은 결코 느릿하지도 않다. 그렇다고 재빨리 경망스럽게 비호처럼 하늘로 치닫지도 않는다. 부드럽기가 한량없는 처마선이다. 팔작지붕 곡선이 우위에 서게 된 것은 정신적인 것의 드높임을 뜻한다고 했다. 나아가 우리민족이 전통적으로 천天을 숭상해 왔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고까지 했다. 더욱이 무량수전 기둥이 배흘림이어서 직선다운 곡선, 곡선다운 직선이고, 배흘림기둥 위에 처마 곡선이 내려앉으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조합이 아닌가.
 
부석사는 우리나라 화엄사상의 발원지이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했다. 의상대사와 선묘 아가씨의 애틋한 사랑이야기도 화엄 세계의 한 장면일까. 그 사랑이 도달한 그 자리이다. 참된 근원을 밝히는 한 폭의 그림. 번뇌의 바람이 잠든 마음의 바다. 법성의 바다, 거기에 이르게 하는 210자의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가 만상을 비추고 있다.

그중에서 “무량한 먼 시간이 곧 한 생각이오(無量遠劫卽一念), 한 생각이 곧 무량한 그 시간이니(一念卽無量劫)”를 읊어 보니 무량한 시간도 한곳에 머무르는가. 그래서 의상대사는 ‘가고 가도 본 자리에 있고, 오고 와도 떠난 그 자리에 있다(行行本處 至至發處)’라고 했나 보다. 우왕좌왕하지 말고 오늘에 충실하며 살라는 말로 들린다.

건물에 안정을 주고 부처님의 사상을 담고 있는 수덕사 대웅전이나 부석사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은 언제 가서 봐도 나를 반하게 한다. 돌아서는 나의 발길을 배흘림기둥이 자꾸만 붙잡아 세운다.



 

편집부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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