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다’는 형용사고 ‘늙다’는 동사다. ‘젊어간다’는 말은 없어도 ‘늙어간다’는 말이 존재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누구에게나 늙음은 진행형이다.
윤성희 작가『노년의 발견』에서 처음 알았다. ‘젊어간다’는 말은 없고 ‘늙어간다’는 말은 있다는 것을, 그러니 누구나 ‘늙음’으로 가고 있다. 걱정은 걱정이다. 지금 우리 주변엔 아이의 탄생은 적고 노인은 많다.
노인들을 어찌할까? 이런 걱정은 우리만 하는 것이 아닌가 보다. 일본도 미국도 프랑스도 스위스도 같은 걱정을 한다. 미국 작가 로이스 로리(lois Lowry)가 1937년에 쓴『기억 전달자』에선 일정한 인구를 안정된 환경에서 살게 하려고 여러 통제를 한다. 노화는 통제를 못 하는지 노인이 되면 노인들만 사는 집에서 지내다가 이별의 축하를 받으며 문 저쪽으로 사라진다. 사람들은 멋진 세계로 가는 줄 알지만 실은 안락사를 하는 것이다.
프랑스 작가 베르베르 베르나르가 2003년에 쓴『나무』에선 ‘황혼의 반란’이란 단편이 있다. 자식들이 부모를 당국에 신고하면 잡아간다. 안 잡히려고 도망친 노인들이 동굴에 숨어서 살다가 마침내 잡히는 내용이다.
스위스 작가 케이티 엥겔하트(Katie Engelhart)가 2022년에 쓴『죽음의 격』에서는 인간의 존엄사에 관해 말한다. 세상엔 죽음을 마주하고 어느 정도 통제하길 바라는 사람과 죽음에 관해 생각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을 뿐이라며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던진다. 언젠가 맞을 죽음, 그러면 그 죽음을 맞기 전 어떻게 살 것인가란 생각에 닿는다.
16세기에 철학가 몽테뉴는『나이 듦과 죽음에 대하여』란 책에서 우리는 이미 노화를 통해 죽음을 조금씩 대비할 수 있다고 위로한다. 자연이 우리에게 죽음을 학습할 기회를 주는 것이란다.
윤성희 평론가도 노년을 맞으면서『노년의 발견』을 썼다. 삶에 대한 성찰과 통찰이다.
누구나 늙고 누구나 죽지만 누구나 늙음에 대해서 또는 죽음에 대해서 깊이 성찰하는 것은 아니다. ‘철학이란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를 배우는 것이다.’란 몽테뉴의 말처럼 어떻게 늙어가고 죽어야 하는가를 아는 것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나이 든 사람만 읽는 책이 아니라는 뜻이다. 철이 드는 나이부터 장년, 그리고 노년이 읽고 자기 삶을 다시 정비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책이다.
22편의 글에는 다양한 주제가 있다. 사촌, 친구, 고향, 자식, 부부 또 청춘, 나이, 사별, 인생, 장수, 나잇값, 까치발, 무덤, 등 다양한 분야를 사색한다.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기도 하고 자식의 입장에서 부모를 보기도 하고 또 부부를 본다. 친구와 사촌과 고향을 통해 또 다른 나의 확대도 본다. 환갑을 통해 인생의 이정표를 세우고 불로장생, 요양원, 고려장과 무덤까지 본다.
미치 엘봄(Mitch Albom)이 죽어가는 스승을 화요일마다 만나서 죽을 때까지를 쓴『모리와 함께한 화요일』도 좋지만, 윤성희 작가의『노년의 발견』에서처럼 각각의 주제로 만나는 삶도 좋다. 몸 따로 마음 따로 논다는 생각이 들면 얼른 이 책을 사서 읽어야 한다. 부모가 생각나면 읽고, 떨어져 사는 자식이 그리우면 또 읽을 일이다.
‘자식에게 누를 끼치고 싶지 않은데 몸은 전 같지 않다’라는 생각이 들면 또 읽어야 한다. 그리스와 로마 신화의 큐비트부터 동양의 월하노인까지, 오디세이부터 나태주 시인이 병원에서 죽음을 앞두고 쓴 시 ‘그러지 마시어요’까지 다양하게 인용한 글도 재미있다.
이런 글을 쓸 수 있다면 노인이 되는 것도 두렵지 않다. 세월을 향해 ‘어서 오라’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