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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쌈꽃이 피었네

선우혜숙/ 천안 수필가

등록일 2022년11월26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눈이 떠졌다. 아침이 되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다른 때 같으면 더 잘 수 있다는 행복감에 젖어 이불 속으로 다시 파고들었겠지만 나도 모르게 용수철처럼 퉁겨져 일어났다.

난생처음 내 손으로 김장하는 날이다. 어제저녁 배추를 소금에 절임으로써 김장은 시작되었다. 배추를 소금물에 담갔다가 꺼내어 사이사이에 소금을 뿌렸다. 그리고 잠들기 전 배추를 뒤집어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절이는 것쯤이야 예전에 어머니가 김장하실 때 어깨너머로 본 기억도 있어 혼자 할 수 있다고 큰소리를 떵떵 쳤는데, 어찌 된 일인지 배추가 도로 밭으로 가려고 하고 있지 않은가.

소금을 적당히 뿌리라고 했는데 아무래도 부족했던 모양이다. 어느새 남편도 잠에서 깨어 밖으로 나왔다. 지금 소금을 뿌리면 안 된다느니 지금이라도 뿌려야 한다느니 티격태격하면서 다시 배추를 절였다. 너무 이른 시각이라 전화를 해 물어볼 수도 없었다.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는 적당히라는 말의 중요성을 새삼 깨달았다. 세상사 쉬운 일이 없다지만 배추 절이기조차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나이 오십이 넘어서야 알게 되었으니…. 

칠남매의 막내와 결혼한 나는 형님들의 총애를 받으며 이 나이 되도록 김장을 얻어먹는 호사를 누렸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형님들에게 나는 딸 같은 올케고 동서였다. 무한한 혜택과 보살핌을 지금도 받고 있는 중이다. 올 김장부터는 직접 담가보겠다고 했다.

우왕좌왕 시행착오를 겪으며 남편과 둘이 김장을 했다. 그동안 형님들에게 받은 사랑이 더 크고 감사하게 다가왔다. 

김장재료를 준비하며 남편이 좋아하는 장모님표 김치 한가지를 더 담가보기로 했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가 해주시던 보쌈김치다. 어머니는 배추 김장이 끝나면 마지막으로 보쌈김치를 담그셨다. 그 당시 다른 집에서는 거의 볼 수 없던 개성식 보쌈김치는 우리 집만의 별미였다. 엄마의 손맛으로 기억되는 김치다.

먼저, 겉을 쌀만한 절여진 배춧잎을 골라놓고, 배추의 줄기부분과 무를 납작하게 썰었다. 물오징어를 손질해 썰고, 생새우와 굴도 깨끗이 씻었다.

달착지근하고 시원한 맛이 나도록 배와 양파도 곱게 갈았다. 갓, 미나리, 파를 같은 길이로 썰었다. 재료에 갖은양념을 넣고 고춧가루로 빨간 옷을 입혔다. 이제 솜씨 부릴 시간이다. 움푹 파인 사발에 골라놓은 배춧잎 너 댓 개를 포개어 깔고 국자로 소를 떠 넣었다. 그 위에 밤, 대추, 곶감을 잘게 채 썰어 잣과 함께 올리고, 꽃 모양을 낸 당근과 빨간 실고추로 한껏 치장을 한 후 정성스레 이파리로 감쌌다.

처음엔 찢어진 잎 사이로 속 재료가 삐져나와 벌겋게 물이 들고 생각대로 잘되지 않았다. 그러나 차츰 요령이 생기면서 동그란 모양의 예쁜 김치가 만들어졌다. 겹겹이 싸인 보쌈김치를 보니 자식들이 다칠세라 다른 길로 빠질세라 포근히 감싸 안은 어머니의 치마폭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의 맛으로 추억되는 김치에 어머니의 따스한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했다. 먹을 때 이파리를 한 잎, 두 잎, 걷어 내면 그 속에 예쁜 꽃 한 송이가 활짝 피어 있었다. 

그 옛날 보쌈김치 한 보시기는 아버지의 술안주로도 손색이 없었고 손님상에 얌전히 오르던 특별한 반찬이었다. 지금도 어릴 적 친구들은 어머니의 보쌈김치 맛을 이야기한다. 배추김치만 먹다가 가끔 상에 올라온 보쌈김치에 따끈한 밥 한 공기면 참으로 행복했다. 어머니의 사랑도 함께 먹고 자라던 시절이었다. 

요즘은 인터넷으로도 김치 담그는 법을 얼마든지 배울 수 있지만 어머니가 해주시던 그 맛 그대로 엄마의 맛을 우려내고 싶었다. 몸이 불편하신 팔순이 넘은 어머니께 전화로 물어가며 우여곡절 끝에 보쌈김치가 탄생되었다.

어설펐지만 올해 김장은 내 손으로 했다는 뿌듯함에 기분이 좋다. 연탄 들여놓고 김장김치 담그면 이제 추워져도 괜찮다고 하시던 어머니 말씀이 생각난다. 그 말을 이해할 것 같다. 김치를 담그면서 어머니의 소중함을 새삼 느낀 하루였다. 어머니가 곁에 계신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행운이다. 

겨울이다. 어머니의 사랑이 담긴 보쌈김치처럼 서로 감싸주고 안아주며 모두에게 따뜻한 겨울이 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내년에도 어머니를 생각하며 보쌈김치를 담글 것이다. 적당히 절여진 배추로….



 


 

편집부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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