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을 읽었다.
기껏 60페이지도 안되는 무척 가냘픈 두께의 책. 제목이 주는 호기심과 함께 표지에 큼지막하게 박힌 ‘202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는 문구가 나를 읽게 하도록 유혹했나 보다.
'성(性)'적인 이야기인 만큼 일단 첫 글을 접하는 순간 '야'하다는 느낌이 강렬하다. 특히 1940년생 그녀가 ‘직접 체험하지 않은 허구를 쓴 적이 한번도 없다’는 문제적 작가. 그런 그녀의, 관계 자체를 예리한 감각으로 써내려가는 솜씨가 외설조차 예술로 착각이 드는, 마술사같다.
<올여름 나는 처음으로 텔레비전에서 포르노 영화를 보았다>로 시작하는 첫문장. 그리고 두 남녀의 성적행위를 적나라하게 묘사하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장면에 익숙하겠지만, 포르노 영화를 처음 보는 나로서는 무척 당혹스러웠다>는 그녀.
그래서 그녀는 남녀관계의 숙맥(菽麥)인가 하면, 알 만큼 아는 그녀 아닌가.
단순한 열정은 그가 비교적 젊은 시절 직접 겪은, 러시아 외교관과의 불륜 이야기다.
‘불륜’을 미화하는 건 아니지만, 들키지 않았다는 전제하에서 나름의 낭만이 스며있다.
결코 추잡하거나 불행하지 않다. 첫사랑처럼, 또는 짝사랑처럼, 그러나 그건 첫사랑도 짝사랑도 아닌 그저 ‘불륜’일 뿐이다. 개인은 스스로를 속이면서까지 아름답게 합리화할 수 있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은 시퍼런 날이 서있다.
글 속의 그녀는 불륜이 시작되고부터 오로지 초조하게 기다리는 여인이 된다. 나이와 자녀는 그녀에게 가치없는 허울일 뿐이다. 또한 상대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은 ‘맘껏 만나지 못하는’, 불편한 캐릭터로만 존재한다.
한 소년의 기억속에 어릴 적 초등학교때 구멍가게에서 연필깎이 칼을 훔친 적이 있다. 하필 가게주인이 등을 돌리며 훔쳐갈테면 가보라는 듯한 태도에 손이 저절로 반응했더란다. 그리고는 죄를 만회하고자 그가 훔친 칼보다 열배는 비싼 다른 것을 집어 계산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그때부터 집에 가는 내내 '훔친 자'의 경험에 우쭐함도 잠시, 처음 칼을 훔친 손부터 시작된 떨림은 급기야 심장까지 팔딱거리게 만들었다. 그 강렬한 기억을 어찌 잊으랴. 그 소년은 수십년이 지난 장성한 뒤에도 그걸 잊지 못한다.
그녀도 그랬나 보다. 연필깎이 칼과는 비교도 안되는, 남자를 훔친 것이다.
저도 모르게 사회로부터 급작스럽게 훔쳐내고는, 한편으로는 즐기면서 또다른 한편으로는 심장을 한껏 옥죄는 떨림을 느끼는가 보다. 심장이 크게 뛸수록 살아있음을, 살아있다는 확신을 방증한다.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그 사람이 전화를 걸어주거나 내 집에 와주기를 바라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거나 <그 사람이 오면 어느 방에서 사랑을 나눌지 상상한다>는 그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내가 관심을 갖는 유일한 화제는 그 사람의 직업이나 나라, 혹은 그 사람이 가봤던 장소 등, 그 사람과 관련 있는 것들 뿐이었다>고 고백한다.
여자는 그렇거니와 남자는 그녀를 마음에 든 창녀처럼 취급하는지도 몰랐다. 아주 가끔씩 몰래 시간을 내어 그녀를 찾아 불같은 사랑(?)을 하고 바람처럼 사라지는 걸 반복하는 남자.
어쩌면 학교가 끝난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무밭을 발견한 소년일 지도 모른다.
소년은 전장터의 유능한 병사처럼 재빠르게 맛나보이는 무를 하나 쑥 뽑아 누가 볼세라 줄행랑을 친 후 허겁지겁 무로 허기진 배를 채운다. 무보다 그같은 행위가 소년의 '쫄깃한 쾌락'을 채워주는데 만족하는 것은 아닐지.
남자는 여자가 그런 존재였을 지도 모른다. 아내는 아내대로 인정하고 사는 남자에게 있어 불륜의 상대는 어찌 보아야 하는가 말이다.
그건 배고픈 소년에게 보이는 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수 있다.
그녀의 로맨스는 한동안 계속 됐지만 그 끝은 결코 영원으로 이어질 수 없는 법.
<그런데도 나는 그 사람을 끊임없이 기다리고 갈망했던 지난해 봄 그 사람을 떠날 수 없었던 것처럼, 지금도 여전히 그 사람에게서 떠나지 못하고 있다>는 그녀에게 영웅심리가 엿보이기도 한다. 흡사 ‘적과 흑’ 속에 쥘리엥을 그녀의 방식으로 사랑한 '마틸드'처럼 말이다.
자기가 주인인 소설은 ‘미화’되기 일쑤다. 낭만이 흐르고, 순수가 흐르고.. 그렇지만 그녀는 현실을 망각하지 않는 냉정한 지성인이기도 하다.
불륜은 곱게 치장해도 그녀의 말처럼 ‘단순한 열정’일 뿐이다. 그것을 뒷받침해주듯 남자를 떠나보내고 나서, 그녀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이번에는 아주아주 어린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져 버렸다.
4일간의 불륜을 인생의 추억으로 새긴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프란체스카와는 다른 유형의 사람이다.
불륜, 집착, 탐닉... 아니 에르노의 불륜은 결코 낭만이 될 수 없다. ‘불륜’이 낭만이 될 수 있는가를 차치하고, 대상보다 사랑 자체에 더 매력을 두고있는 그녀의 불륜은 한 때 불같이 뜨거운 것이었더라도 결국 ‘단순한 열정’에 머무르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책이 출간되자 프랑스는 한동안 홍역을 치렀다. 열정적인 불륜에 낭만만을 넣든, 또는 사회의 냉정한 현실만을 넣든 했다면 결코 그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리라.
글쟁이의 반격이랄까. 감추일 걸 드러내고, 낭만이 아니라도 잠깐의 열정에 만족한 ‘그녀같은 유형’은 결코 흔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