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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인들, 즐거운 군위 문화탐방길 

한밤마을 돌담길, 화본역, 인각사로부터 김수환 추기경 생가까지

등록일 2022년09월22일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정인숙 회장과 천안문인협회 회원 24명이 문화탐방에 나섰다.

가을이 들녘을 노랑으로 물들이는 9월17일, 경상북도 군위군 일원이다. 아름다운 간이역으로 소문난 ‘화본역’과 삼국유사 집필지 ‘인각사’와 경주 석굴암보다 1세기 앞서 조성된 국보 ‘삼존석굴’, 그리고 내륙의 제주도라 일컫는 ‘한밤마을’이다. 여기에 더해 바보라 불린 ‘김수환 추기경의 생가와 공원’도 둘러보기로 했다. 
 

천안박물관에 모여 버스를 타는 문인들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하다. 코로나19로 막혔다가 처음 시작한 여행, 그래서 이름도 ‘시간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어디 여행이 버스만 타는가? ‘걷는 것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 놓는 것이다. 발로, 다리로, 몸으로 걸으면서 인간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행복한 감정을 되찾는다.’는 다비드 르 부르통의 글이 아니더라도. 걸으면서 타인이 살아온 흔적도 보고 자연도 보면서 나를 찾으러 간다. 

함께 하는 이가 누구냐에 따라서 버스 안에서의 시간도 달라진다. 신입회원이 있어 서로 자기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더니 글을 쓰게 된 이유부터 아픔을 극복한 일까지 진솔하게 털어놓는다. 누가 글 쓰는 이는 말재주가 덜하다고 할 수 있을까. 글로는 다 알 수 없었던 회원들의 면면을 듣는 재미에 창밖으로 돌릴 눈이 차 안에서 논다. 이정우 천안문학관 관장의 탁월한 인문학적 지식에다 구석구석 재미있는 이야기를 더한 역사탐방 안내를 받다 보니 어느새 첫 여행지에 도착했다. 

대구 팔봉산 북쪽에 자리한 곳이 군위의 ‘한밤마을’이다. ‘한밤’의 유래는 팔봉산 북쪽의 깊은 산골이란 뜻도 있고 밤이 많이 난다는 뜻도 있단다. 부림홍씨 집성촌인 이 마을은 돌담으로 유명하다. 1930년 홍수로 떠내려온 돌을 치울 겸 돌담을 쌓았다는데 길이가 4.5km나 된다. 
 

돌담에 손을 얹으니 따뜻하다. 그러나 이방인을 선뜻 품을 마음은 없는지 돌의 표면이 거칠고 검다.

손을 떼다가 가만히 보니 이끼로 덮인 돌 속에 각 무늬와 문양이 있다. 세상에나! 돌이 돌을 품다니. 감탄하다가 내 안을 본다. 내게 다가오는 이를 나와 다르다고 밀어내진 않았는지, 나보다 더 낫다고 질투하진 않았는지, 조금 먼저 안다고 무시하거나 윽박지르지는 않았는지….

한걸음 물러서서 보니 둥근 돌, 모난 돌, 큰 돌, 작은 돌은 서로 자리를 내어주며 돌담이 되었다. 그리고 수백 년을 이어오고 있다. 돌담은 삐뚤빼뚤 이 집 저 집을 품으며 골목을 지키고 빈집도 지키고 있다.

돌담이 품던 그들은 어디 있나, 다른 돌을 품고도 둥글어지는 넉넉한 돌 같은 이들은 또 어디 있나. 그들을 찾느라 돌담 너머 집 안을 훔쳐보는 얼굴에 꽃을 단 박주가리가 닿았다.
 

▲ 담장 위의 석류.

빨간 유홍초도 질세라 담을 덮고 있다. 담쟁이도 넘고 호박넝쿨도 덮고 있다. 이런 마을에서 숙박도 할 수 있다니, 그러나 숙박 안내판이 붙은 남천고택의 문은 굳게 잠겨있다.

눈이 펄펄 내리는 날 눈 쌓인 돌담을 보며 하룻밤 묵고 싶다고 마음으로 전화기를 돌린다. 
 

▲ 대율리 대청에서.


앞서가는 문우들을 시나브로 따라가다 보니 마을 한가운데 큰 대청이 있다. 지금도 마을사람들이 회의할 때면 모인다는 ‘군위 대율리 대청’이다.

조선 전기에 세워졌으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인조 때 다시 세웠다는 대청은 50여 명은 앉을 만큼 마루가 넓다. 우리도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더위를 식힌다.

기와지붕 아래 부는 바람이 시원하다. 대청을 둘러싼 나무들의 둥치가 제법 크다.

목백일홍은 벌써 졌고 은행나무에서 누런 은행이 툭툭 떨어지고 있다. 마을 어르신이라도 만나 이 마을의 전설을 듣고 싶다. 그런데 도통 마을사람을 만날 수가 없다. 
 

▲ 군위 삼존석불 가는 길.


군위가 품은 삼존석굴로 향한다.

제2석굴암이라 불리는 이 석굴은 높은 절벽 가운데 있다.

덩굴로 덮여 모르고 있다가 1927년 최두환이 소나무에 밧줄을 매고 내려가 나무 틈에 있던 굴을 발견했단다. 국보 109호다.
 

▲ 군위 삼존석불이 있는 동굴이 멀리 보인다.


자연석굴에 아미타불과 대세지보살, 관음보살이 온화한 자태를 드러낸다. 석굴암보다 1세기 앞서 창건된 것으로 경주 석굴암의 모태임이 밝혀져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이제 슬슬 배고파지는데 어디선가 구수한 청국장 냄새와 기름 냄새가 솔솔 난다.

따라가 보니 두부를 직접 만드는지 두부모가 한판 가득인데 옆에 비지도 있다. 눈으로 보고 냄새를 맡으면 들어올 것을 알고 있다는 듯 식당 입구 옆에서 지글지글 파전이 익고 익다. 시골집을 이리저리 내어 만든 ‘시골밥상’집이다.

금방 부친 파전과 시원한 막걸리로 목을 축이고 순두부찌개와 비빔밥을 먹고 나니 등이 절로 벽에 붙는다. 더 머물고 싶은 몸을 일으켜 마을 정자 아래서 파는 사과를 맛보고 화본마을로 간다. 네티즌들 사이에 아름다운 역으로 소문난 화본역이 있는 마을이다. 
 

우체국, 은행, 면사무소, 정미소, 전파사, 미용실, 중국집까지 시골마을의 작은 거리엔 있을 것이 다 있다. 그런데 화본역 옆의 거대한 느티나무 두 그루가 발을 잡는다. 나무그늘에서 쉬어가라고 의자도 있다.

기차카페에서 차 한 잔 들고 나오니 음악소리가 들린다. 기타와 음악이 있으니 여행자도 주민도 함께 어울린다.

흥이 절로 나면 누구의 손인들 어떠랴. 서로 손을 잡고 음악에 맞춰 빙빙 돈다. 느낄 수 있는 것을 느끼고, 먹을 수 있는 것을 먹고, 흥겨우면 소리를 내는 즐거움이 그곳에 있다.  
 

▲ 혜원의 집으로 가는 길.


다음 여행지는 영화 ‘리틀 포레스트(little forest)’ 촬영지다.

주인공 혜원의 엄마는 토마토를 먹다가 밭에 휙 던지며 “잘 익은 토마토는 절로 싹을 내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달랑 편지 한 장 남겨놓고 집을 나갔다. 혜원이가 고등학교를 졸업도 하기 전이다.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던 혜원은 엄마의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밭에서 절로 싹을 틔운 토마토같이 살아낸다. 양파도 심고 감자도 심으면서 인생을 알아가는 혜원이 곁엔 아주심기를 하러 내려올 것이라 믿는 소꿉친구도 있다.

금방이라도 혜원이 국수 한 그릇 만들어 낼 것 같고, 감을 깎아 곶감을 만들 것 같은 소박한 집에서 봄과 여름도, 가을과 겨울도 맞고 싶다. 가을이 듬뿍 든 집 주변을 눈에 담고 인각사로 향한다. 
 

▲ 쓸쓸해보이는 인각사 극락전.


인각사는 보조국사 일연이 충렬왕 10년(1284)부터 5년간 머물며『삼국유사』를 집필한 곳이다. 선덕여왕 때 원효가 세운 절인데, 고려 때 크게 증축했다던 옛 건물은 주춧돌만 발굴해서 한쪽에 모아 놓았다. 법당과 건물 2채가 전부다.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와 양 맥을 이루는 삼국유사가 집필된 곳이 이리 방치되었다고 믿고 싶지 않다. 중건계획 중이라 믿고 싶다.

역사를 소홀하게 하는 나라가 흥하는 것을 못 보았다고 말하지 않는가.

어제 없이 오늘이 없다. 다음에 올 때는 철저한 고증으로 다시 세워진 인각사를 보고 싶다.  
 

▲ 김수환 추기경의 사랑나눔공원에서 단체사진.


오늘 여행의 마지막 장소는 김수환 추기경의 생가와 사랑과나눔 공원이다.

맑은 하늘에 김 추기경이 좋아했다는 코스모스와 구절초가 향을 올리고 있다. 낮은 언덕에 있는 김 추기경의 생가는 방 둘에 부엌이 하나다.

5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나 8살에 아버지를 여읜 김 추기경은 신부가 되기보다는 장사를 하며 어머니를 모시고 싶었다. 남편 없이 옹기장사를 해서 자식을 키운 어머니의 고생을 보며 자랐기 때문이었나 보다.

그러나 어머니의 뜻은 달랐다. 김 추기경의 조부 김보현은 병인박해 때 순교했고 부모 역시 신실한 천주교 신자다. 친형 김동한도 역시 신부였다. 
 

기념관에서 사제서품 후 어머니와 찍은 사진을 본다. 사제복을 입고 선 아들 옆에 앉은 어머니는 예수가 간 길이 그러했듯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꽃길만일 수 없다는 것을 아셨나 보다.

좁은 어깨에선 겸손이, 내리뜬 눈에선 슬픔이 느껴진다. 기도하며 바라고 바라던 길을 아들이 간다. 그러나 이젠 내 자식이 아니라 하느님의 도구로 쓸 사제다. 그 마음을 담은 어머니의 눈을 보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내 어머니의 말씀이 생각나서다.

누구에게도 무엇에게도 빼앗기지 않을 귀한 딸을 공부해야 하는 것에는 내줄 수밖에 없어 너를 보낸다 하셨다. 초등학교 졸업식도 못하고 나는 어머니 곁을 떠났다. 보통의 엄마, 보통의 딸도 눈물로 헤어졌다. 김 추기경의 마음은 어땠을까.
 

▲ 김수환 추기경 생가 마루에 앉아서.


차동엽 신부가 엮은『친전』에서 김 추기경은 도망치고 싶었다고 했다.

골치아픈 일이 잇따라 터질 때는 이 십자가를 언제 벗나 탄식을 하며 도망칠 궁리를 하면서 살았단다. 주교 서품식 때는 전례서 맨 끝장에 있는 주교 직위 박탈사유와 절차를 유심히 읽어보기도 했단다. 결국 도망치지 못하고, 도망치지 못한 우리의 친구가 되었다.

“나도 외롭다. 나도! 그리고 너의 고독을 공감한다.” 라며 치열한 고독으로 우리의 외로움을 위로했다. 심적 고통을 견디기 힘든 순간엔 하느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로 버텼단다. 교구장직 30년의 버팀목은 기도였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바보로 불렸던 김 추기경은 국민의 사랑을 듬뿍 받다 가셨다. 이유는 단순하다. 군사정권 하에서도, 광주사태 때도 늘 약자 편에 서서 정권과 맞섰다. ‘사제의 정치참여’가 아니라 ‘고난에 처한 국민과 함께한 것’이다.

소리를 낼 때 소리를 내고, 용기를 낼 때 용기를 낸 분이기에 사랑과 존경을 받는다. 그러나 자신을 위해 이 세상에서 쌓아놓은 것은 없다. 300만원이 든 통장이 전부다. 그것도 어려운 이를 위해 쓰려고 모아둔 돈이다. 스스로 자화상을 그리고, ‘바보야’라고 썼다. 왜 바보냐고 물으니 “나는 바보가 맞네. 하나님은 위대하고 사랑과 진리 그 자체인 것을 알면서도 마음속 깊이 깨닫지 못하고 사니까 말일세.”라고 하셨다.

그러면 기도합네 하고 고개를 숙이고, 성모송을 올린다고 묵주를 돌리는 나는 무엇인가.  

돌아서는 길에 김 추기경의 글이 눈에 들어온다. 

“당신이 태어났을 땐 당신만이 울었고 당신 주위 모든 사람이 미소를 지었습니다.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날 땐 당신 혼자 미소짓고 당신 주위 모든 사람이 울도록 그런 인생을 사십시오.”

자연과 조상의 옛 자취를 느리게 또 평온한 마음으로 더듬어 본 여행이다. 사부작사부작 걸으며 한 여행이지만 서로 배려하고 이끌며 본 가을 풍경과 문화유산이 오래 남을 듯 문우들의 얼굴엔 미소가 담겨있다.

분홍색 빨간색 보라색으로 순식간에 물드는 석양을 보며 마음은 다음 여행을 꿈꾸고 있다. 길을 잃고 헤맬지라도 낯선 곳을 또 더듬고 싶다.  
 

김다원 리포터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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