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것은 무엇이며, 또한 사라지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천안에는 오래된 것들이 있다. 안서동의 느티나무나 성환읍의 향나무는 800년이 넘었다.
국보는 모두 3개가 있다. ▶봉선홍경사 사적비갈 ▶천흥사 동종 ▶보현인석탑이 그것이다.
봉선홍경사 갈기비(국보7호)
성환에는 1021년에 봉선 홍경사가 지어지고 창건된 지 5년 뒤에 세워진 ‘귀부의 어룡’으로, 1000년쯤 된 것도 있다. 이 ‘봉선홍경사 갈기비’은 국보 제7호(1962년 지정)로 보전되고 있다.
고려 현종은 불교를 숭상해온 부왕 안종의 뜻을 헤아려 성환과 평택을 오가는 드넓은 들녘에 ‘홍경사’라는 사찰을 세웠다. 이곳은 인가도 없고 갈대만 우거져 도적이 들끓던 곳이었는데, 사찰이 세워지자 도적떼도 사라졌다.
홍경사(弘慶寺)는 아버지의 뜻을 받들었다는 ‘봉선(奉先)’을 달아 『봉선 홍경사(弘慶寺)』로 불리우며 성황을 이루었다. 하지만 150년쯤 지난 1176년, 공주에서 발발한 망이·망소이난때 모두 불타 없어지고 절의 창건에 관한 기록을 담은 갈비만 남게 되었다고 한다.
귀부의 어룡은 당대(고려조) 최고의 문장가인 최충(崔沖)이 지은 비문을, 그리고 최고의 문필가인 백현례(白玄禮)가 쓴 비문을 등에 업고 있다.
참고로 갈비(碣碑)는 일반적인 석비보다 작은 것을 말한다. 보통 거북 받침돌을 쓰는데, 홍경사 사적갈비는 용의 머리에 물고기 지느러미 같은 날개를 머리 양쪽에 새겼다. 특히 비신을 받치는 귀부의 어룡이 머리를 오른쪽으로 돌리고 있는 점은 특이하다.
동국대가 보관중인 ‘보협인석탑’
‘보협인석탑’은 국보 제209호다.
보협인탑이란 ‘보협인다라니경’을 그 안에 안치하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한국에서는 유일한 석조 보협인탑이다. 한국 석탑의 형식과 전혀 달라서 기단과 탑신 구분이 뚜렷하지 않고 완전한 형태를 짐작하기도 어렵다.
상자모양의 돌 2개를 포개놓은 후 그 위로 귀를 세운 머리장식을 얹어놓은 모습이다. 탑몸돌 윗면 중앙에 ‘보협인다라니경’을 안치했을 것으로 보이는 둥근 사리구멍이 남아있다.
이 보협인석탑은 천안 북면 대평리 탑골의 절터(구룡사로 전해진다)에 있던 것을 1967년에 동국대학교 박물관으로 옮겨 세웠다.
천안에서 출토된 국보급 문화재로, 천안에서는 지속적으로 천안에 환수돼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되고 있다.
충남반출문화재환수운동본부와 충청남도국외소재문화재실태조사단, 그리고 천안향토문화연구회가 2021년 말부터 반출경위 조사와 환수운동을 펴고 있다. 김종식 천안향토문화연구회장이 올해 2월 동국대와 문화재청에 입수경위 관련 정보공개를 요청한 바 있다.
이에 동국대측의 답변은 이렇다. 1967년 9월 보협인석탑편 4점이 무단반출돼 충청남도교육위원회 문화계에서 전문가에게 사진 및 유물조사를 의뢰했다. 당시 석탑편 3점은 사지로부터 반출돼 우물 빨래터에서 사용하고 있었으며 나머지 1점은 하천 둑으로 사용되었다. 1968년 유물의 안전한 보전과 복원, 연구를 위해 본교 박물관에 기증되었고, 활발한 연구로 유물을 현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1988년 보협인석탑 기단 부재를 본교예산으로 구매해 유물을 보존하기도 했다. 유물 기증 및 구입에 관한 사항은 대외비에 해당하므로 기증자에 대해서는 공개불가로 답변했다. 또한 문화재청은 국보 지정경위에 대해 ‘1982년 국보지정시 동국대가 제출한 자료는 문화재청에 별도 보관돼 있지 않다’는 답변을 보내왔다.
천흥사동종(국보 제280호)
통일신라 동종을 계승한 가장 오래된 고려시대 종으로, 위패 모양의 틀에는 요나라 통화(統和) 28년인 1010년 성거산 천흥사에서 만들었다는 글이 새겨져 있다.
천흥사지에서 출토된 것으로 보이는 천흥사 동종은 제작기법이나 양식이 고려 범종을 대표하는 가장 오래된 고려시대의 종으로, 국보 제280호로 지정돼 있다. 상원사범종(725년·신라 성덕왕 24년)과 에밀레종으로 알려진 성덕대왕신종(771년·통일신라 혜공왕 7년) 다음으로 거종이다.
서기 1010년(고려 헌종 1년)에 주조된 종으로, 위패형의 명문곽에 ‘천흥사’라고 명기돼 있으며, 비천상 등 신라종의 특징을 이어받고 있다. 종신 상부에는 네 군데에 9개의 연꽃봉오리 장식이 있고, 하부에는 종을 치는 자리인 당좌와 비천상을 교대로 배치했다.
천흥사가 폐사한 후 어떤 연유인지 모르나 경기도 남한산성에 옮겨져 사용되다 경기도 광주군청, 덕수궁 미술관을 거쳐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1993년 9월10일 지정됐으며, 종고는 1천6백76㎜, 구경 9백55㎜, 두께 88㎜ 규모다.
921(태조4년)년에 창건했다는 성거산 천흥사지를 찾아 성거읍에 들어서면 천흥사지를 찾기는 어렵지 않다. 작은 푯말이 있기도 하지만, 마을 위에 천흥저수지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천흥사지가 있는 천흥2리 마을은 200여 세대가 살고 있으며 주 소득작물은 배나무로, 마을 주변이 온통 배나무로 뒤덮여 있기도 하다. 폐사된 천흥사 흔적이라면 오층석탑과 당간지주만 남아있다.
천흥사지 푯말을 따라 골목길을 가다 보면 5.4m 높이의 천흥사지 당간지주가 눈에 들어온다. 구 성거읍사무소에서 동쪽으로 꺾어들어 천흥리 마을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 것.
보물 제99호로 지정된 당간지주는 서기 1002년(고려 목종2년) 천흥사가 창건되며 천흥사 입구에 세워져 깃발, 쾌불 등을 세우는 역할을 해왔다.
당간지주는 천년을 흘러왔어도 크게 훼파된 곳은 없었다. 다만 조선 말엽 대원군이 경복궁 재건시 당백전을 주조하기 위해 당간을 수거해 원형을 볼 수 없다. 호서지방에서 가장 수려한 것으로, 세로줄과 보상화문을 양각해 멋을 낸 천흥사지 당간지주는 정부가 1991년 주변토지를 매입해 정비해 놓고 있다.
당시 천흥사의 형태는 알 수 없으나 당간지주 등으로 미뤄볼 때 천흥사의 위용을 짐작할 수 있으며, 현재는 사방으로 집들이 들어차 있어 더더욱 옛 흔적을 찾기는 어렵다.
발길을 돌려 보물 제354호로 지정된 천흥사지 5층석탑을 찾았지만 숨바꼭질하듯 한참을 헤매서야 눈앞에 나타난다. 마을과 천흥저수지 중간쯤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당간지주에서 100m 정도 떨어져 있었다. 5.27m의 5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 석탑양식을 이어받은 고려시대 석탑으로,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이나 익산의 왕궁리 5층석탑과 닮은 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