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 청수동 법원 뒷산을 걸을 때다. 나뭇가지가 팔에 스치는가 싶었는데 아프다. 피는 안 났으나 하얀 자국이 길게 생겼다.
돌아서서 흔들거리는 가지를 잡고 보니 가시가 있다. 내 키만큼 자란 아카시아다. 나뭇가지에만 가시가 있는 것이 아니다. 손에 쏙 들어올 만큼 자란 둥치에도 가시가 달렸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저기 큰 아카시아가 가지 가득 하얀 꽃을 달고 달콤한 향을 바람에 싣고 있다. 그런 나무 둥치엔 가시가 없다.
아하! 여린 가지와 잎을 좋아하는 초식동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만큼 자랐으니 가시 따위는 필요 없다는 거지. 둥치를 자세히 보니 수피가 세로로 갈라졌다. 나무도 껍질이 찢어지는 고통을 겪으며 성장하는구나. 나무둥치의 터진 부분을 쓰다듬는데 문득 얼마 전에 읽은 기사가 생각났다.
새내기공무원이 자살했다는 기사다. 시작은 커피 심부름이었다. 그동안 관행처럼 해오던 상사의 심부름을 업무와 상관없다고 거부했다가 따돌림을 당한 후다. 20대 초반 간호사가 목숨을 또 끊었단 소식도 있다. 간호사들간에 보이지 않는 괴롭힘 때문이었다. 사소한 것에서 세대간 충돌이 생기기도 하고 같은 세대에서도 나 중심의 사고와 생각의 차이로 충돌이 생긴다.
요즘 젊은이 Z세대가 궁금하다. 1990년대에서 2000년대에 태어나 디지털 시대를 사는 이들이다.
부모 세대보다 풍족한 환경에서 자란 그들은 자기의 인격과 개성이 침해당하는 것을 못 견뎌 한다. 자기의 의견을 표현하는 것에 당당하다. 칭찬엔 익숙하지만 거절당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그렇게 자란 젊은이들이 사회에 나가 부딪히면서 아파한다. 어른들에겐 별것 아닌 것 같은 일에도 죽을 만큼 아파하는 이들도 많다.
그들을 숲으로 초대하고 싶다. 그들과 천천히 숲속의 오솔길을 걷고 싶다. 아카시아 가지를 잡아 ‘아직 어리니 건드리지 마시오.’라고 달린 가시에 손가락을 대보고, 아름드리 상수리나무를 안아보라 하고 싶다.
뿌리까지 뽑을 듯 태풍이 불면 파도소리를 내며 버티는 신갈나무의 울음을 듣고, 둥치가 서로 흔들리면서 꼭대기 가지들이 서로 부딪치면 탁탁 울리는 소나무의 고통을 듣자. 가지 몇 개가 부러지는 것은 예사다. 그런 날들을 견디며 그들은 고목이 된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모여 아름다운 숲이 된다.
내가 받은 상처만 아파하다가 내가 남에게 준 상처를 알아차릴 때 어른이 된단다. 내가 가진 가시도 보고 나를 찌르는 가시도 보자. 그리고 상처가 아물기까지 기다릴 줄 아는 나를 칭찬할 때까지 살아보자. 성서의 고린도후서 12장7절에 나온 가시의 의미도 생각해 보자.
‘…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